: CHAPTER 3. 5104호 사람들
수술 후 이틀이 지나자, 서서히 몸이 회복되어 갔다.
3일째 아침까지는 남은 무통주사 덕분에, 움직일 때 뱃속이 당기고 불편한 것 외에 통증은 참을만했다. 다만 배꼽을 통해 뱃속에서부터 밖으로 연결된 가늘고 투명한 튜브가 몹시 거슬렸다. 튜브 끝에는 주먹만 한 동그란 주머니가 매달렸는데, 수술 부위에서 다 제거되지 못한 피가 튜브를 통해 주머니에 모였다. 붉었다. 뜨뜻미지근했다. 보기 싫었다. 그것을 환자복 주머니에 넣고 다녀야 하는 건, 더 싫었다.
통증보다는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운 게 참기 힘들었다. 어지러운 건 아마도 금식 때문인 것 같고, 속이 울렁거리는 건 무통주사 때문이었다. 마약성 진통제의 부작용이다.
3일째 오후에는 소변줄을 제거하고, 이제 조금씩 걸어야 한다는 말에 걷기를 시도했다가 좌절했다. 몸을 바로 세우니 뱃속이 죄다 뒤틀리는 것처럼 아팠다. 시간이 지나 많이 회복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모두 무통주사의 효력이었다. 하긴, 생배를 갈라 뱃속을 헤집어 놓았는데 아프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무통주사가 끝나고 하루 4번, 일정한 간격으로 진통주사를 맞았다. 그 사이사이에는 항구토제를 맞았다.
4일째가 되자, 몸이 훨씬 가뿐해졌다. 조금씩 걷기 시작했다. 가스 배출을 해야 식사를 할 수 있다는 말과, 움직이지 않으면 수술 부위에 유착(떨어져 있어야 할 장기나 조직이 엉겨 붙어 버리는 일)이 생길 수 있다는 말에, 병원 복도를 아장아장 열심히 걸었다. 한 번에 오래 걸을 수가 없으니(힘들어서), 한 바퀴 돌고 병실에 돌아와 잠깐 쉬고, 다시 나가기를 반복했다. 남편의 말에 의하면 횟수를 거듭할수록(아침보다 저녁에 걸을 때) 걷는 힘이 눈에 띄게 달라졌단다. 일취월장이라고 했다. 걸음마를 막 떼고서 받았을 칭찬을, 38세(병원 나이)에 다시 받게 될 줄이야. 감개무량이었다.
4일째 점심에는 내 앞으로 식사가 나왔다. 희멀건 죽이면 어떠하랴, 맛이 심심하면 어떠하랴, 먹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으니, 씹고 뜯고 맛보는 재미는 다음을 기약해도 좋았다.
몸이 회복되는 동안, 5104호 사람들과도 점점 익숙해졌다.
5104호 사람들은 낮에도 조용했다. 대부분은 각자의 침대에 조용히 누워 있었고, 잠이 들었고, 가끔은 누군가 찾아와 침대 옆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통화를 하기도 했지만, 목소리를 키우는 사람은 없었다. 아주 잠깐씩 환자들끼리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또 이내 적막이 흘렀다.
나는 조용한 5104호 사람들이 좋았다. 낮에는 커튼을 활짝 젖혀두어서 병실 안에 햇볕이 가득 들어오는 것도 좋았다. 병실에 TV가 없어서, 누군가 리모컨을 쥐고 하루 종일 시끄럽게 TV를 켜놓는 일이 없는 것도 좋았다. TV를 보고 싶으면 휴게실에 가서 볼 수 있었다.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은 '생생정보통신'과 'VJ 특공대'!! 전국 맛집이 방영되는 화면 앞에서 51 병동 사람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
장 세척제를 싫어하셨던 옆 침대 아주머니는 그것(생생정보통신, VJ 특공대)을 태블릿 PC를 통해 무릎에 놓고 보신다. 해물 짬뽕, 양념 갈비 등이 나올 때는 진짜 참기가 힘들다. 안 보면 될 텐데 눈을 뗄 수도 없으니, 고문이 따로 없다.
며칠을 참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옆 침대 아주머니는 식사를 전혀 못하신다. 대신 하얀색 커다란 주머니를 링거에 달고 계셨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오랫동안 식사를 못하는 환자들에게 영양분을 공급하기 위한 약이었다. 하얀 주머니를 맞으면, 배도 고프지 않고 몸에 힘도 난다. 다만 보통 링거 약에 비해 입자가 굵어서 바늘도 굵은 것을 써야 했다. 그 때문에 혈관이 자주 터져, 주삿바늘을 여기저기 옮겨야 했다.
몸이 아플 때는 맛있는 음식으로 힘을 얻기도 하는데, 먹는 즐거움마저 없는 아주머니는 매일 같이 맛집을 방영해주는 프로그램을 보고 계셨다. 그걸 옆에서 훔쳐보고 있다가, 아주머니에게 들켰다. 눈이 마주친 김에 아주머니와 이런저런 짧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라면 실컷 못 먹은 게 그렇게 억울해."
아주머니는 먹고 싶던 라면을 실컷 먹지 못한 것이 지금 와서 그렇게 억울하다고 했다. 투병 생활 중에 다른 이유가 아닌,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이 가장 속상하다고 했다.
갑자기 나도 라면이 먹고 싶어졌다. 아주머니 말처럼 실컷 먹고 싶었다. 20대 초반 어느 해에 한 달 동안 하루 두 끼를 라면만 먹으며 지냈던 여름이 생각났다. 라면이 너무 맛있어서 그랬다. 그러길 잘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옆 침대 아주머니에 비하면 뽀삐 아줌마는 식사를 잘하셨다. 뽀삐 아줌마는 앞 침대 아주머니다.
뽀삐 아줌마는 체구도 좋고, 드시는 것도 가리지 않고 잘 드셨다. 대신 항상 침대에 누워만 계셨다. 아랫배가 쏟아질 것 같아서 일어나지를 못한다고 하셨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뽀삐 아줌마의 건강 상태는 많이 안 좋았다. 자궁내막암이 재발하면서 다른 곳으로 전이되었는데, 더 이상 손을 쓸 방도가 없다고 했다. 거동을 거의 못하시니, 간병인이 언제나 상주해 있었다. 뽀삐 아줌마는 늘 웃으면서 농담을 잘하셨기 때문에 그런 상황인 줄 그땐 미처 몰랐었다.
뽀삐 아주머니란 별명은 내가 지었다. 물론 남편과 둘이서만 이야기할 때 부르는 별명이었다.
뽀삐 아줌마는 아내가 붙인 별명이다.
뽀삐 아줌마네 집에는 작은 강아지가 있는데, 강아지 이름이 뽀삐였다.
긴 병원생활을 하는 뽀삐 아줌마에게는 그녀를 돌보아온 간병인 아주머니가 계셨다. 간병인 아주머니 특유의 말투 때문에 조선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간병인 아주머니는 뽀삐 아줌마를 살뜰히 챙겼다. 말벗도 되었다가, 수발이 되었다가, 곤란한 일을 대신 처리해주는 해결사 노릇도 했다. 하루 12시간 넘게 간병인 아주머니와 함께 있었지만, 뽀삐 아줌마는 가족들이 그리웠을 것이다. 특히 뽀삐가 그리웠던 모양이다. 하루는 뽀삐 아줌마가 가족들과 영상통화를 하는데, 연신 "뽀삐야~ 뽀삐야~"하고 강아지 이름을 불렀다. 수 십 번을 불러도 강아지가 그리웠는지, 그렇게 또 수 십 번을 "뽀삐야~" 하고 부르시고는 전화를 끊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간병인 아주머니는 그 모습이 기이했는지, 뽀삐 아줌마의 통화가 끝나자 이렇게 물었다. "아니, 왜 그렇게 '복대야~ 복대야~' 하신대? 복대가 뭐예요?"
아마도 간병인 아주머니는 "뽀삐"라는 이름이 생소했던 모양이다.
아내는 그 사건 이후로 건너편 침대 아주머니를 뽀삐 아줌마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