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상해서 볼 수 있다면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by 사건의 지평선

거짓말로 소란한 세상이다. 작금의 대한민국을 살아간다는 건 출제오류 문제를 푸는 것과 같다. 문제가 이상한 상황인데 오히려 사람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답을 찾느라 끙끙 앓는다. 벌거벗은 임금의 나체를 지적하는 아이는 있어서는 안된다. ‘아이야, 임금님의 나체 자체가 비단옷이란다’ 설득력 없는 말을 끊임없이 해대며 거짓말을 믿게 만든다.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우리가 영원히 잃어버린 채 살 거라 생각했던 정직에 대하여 다소 느린 템포로 이야기한다. 후반에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클리셰적 구성이 아쉽긴 하지만 이 작품은 정직이란 유도리 없고 답답한, 쓸모 없는 것들을 수학이란 오브제로 일관성 있게 그려낸다.


대한민국 수험생들 대부분은 수학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입시의 상위권을 가늠하게 하는 과목이 바로 수학이고, 이 과목은 개인의 열심과 노력만으로는 따라가기 어렵고 사교육을 받아야만 고득점이 가능하다. 입시 탈락자들을 배출하는 1등 공신 수학, 그러나 정작 이 학문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향한 발견과 증명되지 않은 것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열린 마음이다. 수학의 언어는 곧 사랑의 언어이기도 하다. "사랑은 끊임없는 발견이며, 나에 대한 발견으로 시작해서 타자에 대한 발견, 그리고 둘 사이를 메우는 불안전한 과정"(주창윤, 《사랑의 인문학》, 2019)과도 같으며, 이는 수학이 답이 없는 문제를 풀어나가는 그것과 유사하다. 그 발견의 과정은 탁월한 비법이나 공식이 아닌 뚜벅뚜벅 일일이 하나하나 계산해 나가는 밤을 세우는 풀이를 통해 문득 찾아오는 예기치 못한 기쁨과도 같다. 마치 "평범한 나뭇가지가 소금광산에서 아름다운 나뭇가지가 되는 것"(주창윤, 《사랑의 인문학》,2019)처럼 말이다.


작품은 결국 정직과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의 예기치 못한 기쁨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우리가 이상해서 진짜를 볼 수 있다면 거짓말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도 우리는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머글이어도 상관 없어, 마법사 옷은 입을 수 있는 거잖아


자사고 ‘동훈고등학교’에는 사회 배려자(이하 사배자) 전형으로 입학한 천덕꾸러기, 예비 전학자로 낙인 받는 열일곱 살 한지우가 있다. 한지우는 수학 9등급, 일명 수포자다. 중학교까지는 전교권에 있었지만, 우수한 아이들로만 구성된 동훈고에서 지우는 열등생으로 추락한다.


“수학이 이래버리면 희망이 없다.”


담임이 지우에게 건네는 말은 단순히 수학 실력에 대한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대치동 스파르타학원에 보내 줄 부모가 없는 너 같은 ‘사배자’에게 이 동훈고등학교는 어울리지 않아, 추천서를 써줄 테니 하루라도 빨리 전학 가는 걸 생각 하란 말의 축약형에 가깝다. 같은 교복을 입고 있어도, 설령 같은 ‘사배자’의 위치에 있더라도 경제력이 없는 지우와 친구들은 엄연히 다른 사람이다.


한지우가 원하는 건 이 학교에서 전학 당하지 않는 것. 그러려면 최대한 조용히 미움 받지 않는 찌질이가 되는 수밖에 없다. 이 학교에서 소문난 머글이어도 상관없다. 동훈고 교복이란 마법사 옷만 입을 수 있다면 차별이건 낙인이건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영화는 공동체에서 ‘배려’라는 명목으로 소외된 이들이, 그들이 받게 되는 ‘배려 속 차별‘에 대하여 분노하면서도 결국 그것마저 없으면 삶의 모퉁이에서 마저도 내쫓길 수밖에 없는 상황을 포착한다. 이에 이들은 그나마도 선심처럼 던져주는 배려를 놓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 거짓말을 선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지우가 같은 방 친구들의 술 심부름을 대신해 주다 탈북민 경비원에게 걸리게 되자 혼자 덤탱이를 쓰기로 자처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나마도 받던 동정이 모멸로 바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머글은 그곳에서 숨 쉴 공간을 허락받기 위해 알아서 수그리고 거기에는 ‘거짓말을 인정하는 것’이 포함된다. 지우가 동훈고를 떠날 수 없는 건 지우가 ‘동훈고’에 있다는 게 중요하다고 믿는 지우 어머니의 강렬한 욕망 때문이다.


“그래, 살아있길 잘했지. 우리 지우 이렇게 근사한 모습 보고.”


지우가 생활하고 평가받는 일상의 공간은 기숙 자사고 ‘동훈 고등학교’이지만, 그의 정신적 버팀목은 홀로 자신을 키우는 어머니다. 어머니는 온갖 욕설을 듣는 콜센터 상담원으로, 기업 시스템의 부조리의 욕설을 대신해 듣는 낮은 계급에 속한다. 그런 어머니에게 명문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지우는 자살하지 않고 살아갈 유일한 버팀목이다. 지우는 동훈고 안에서는 배려 받아야 할 약자의 위치임에도, 그 약자의 위치 마저도 어머니에겐 자랑과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동훈고등학교라는 부조리와 거짓말의 세계를 오히려 스스로 강하게 붙들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자신을 ‘증명’해내야 한다. 내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는 가장 큰 증명 중 하나다. ‘어디‘에 사는지, ‘직업’이 무엇인지, 어느 ‘대학‘에 다니는 지와 같이 ‘눈에 보이는 것’들로 최대한 나를 드러내야 한다. 이 증명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사회에서 고립되며 그것의 허상을 꼬집는 순간 삶의 증명은 실패한다. 그것이 지우가 동훈고의 폭력성과 위선을 알면서도 이를 붙들 수밖에 없는 이유다.


설국열차의 꼬리 칸에 타고 있다 한들, 중요한 건 지금 기차 안에 있다는 거다. 기차에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거고 기차 바깥의 세상은 사망이다. 기차 안에서 부조리가 발생하고 말도 안 되는 거짓말들이 펼쳐진다 한들, 그 안에 있다는 것보다 중요한 걸까? 열 일곱 한지우에게도 이러한 사고가 본능적으로 깃들만큼 이 땅의 증명방식은 단단하게 굳어져버린 상태다.


존재하지도 않는 삼각형의 넓이를 구하는 어떤 바보들


동훈고의 꼬리를 위태로이 붙잡던 한지우에게 탈북민 수위이자 북한 최고의 수학자 리학성이 나타난다. 기숙사에서 한 달 동안 쫓겨난 지우, 집에 있는 어머니가 실망할까 오도가도 못하는 그를 학성이 돌보며 수학을 가르쳐주기 시작한 것이다.


학성과 지우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무겁고 단단한 계급사회의 특권처럼 여겨지던 수학의 비밀이 풀려지기 시작한다. 그 비밀은 수학은 답을 맞히려는 욕심으로는 이해할 수도, 옳은 답을 구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수학이 이래버리면 희망이 없다’는 말은 지우가 들어야 하는 게 아니라 바로 그렇게 가르치는 대한민국 입시다.


리학성이 수학을 대하는 태도는 단순하다. '시험이나 성적 따위에는 관심 없다’ 욕심을 버리고 바라본 수학은 단순하고 명확하다. 이 학문은 누군가를 입시의 언덕에서 탈락시키거나 배제시키려는 도구가 아니며 외려 외롭고 홀로 있는 자의 외침과도 닮아 있다. 남한은 오묘한 수학의 이치를 고작 공식이란 것 하나로 ‘출제자의 의도’ 만이 중요한 것으로 간주해버렸다. 그리고 외려 수학적 끈기를 가지고 근원과 근간을 궁금해하는 걸 ‘쓸모 없는 것’으로 치부하며 치열한 경쟁만을 강조해왔다.


이등변 삼각형의 넓이는 밑변 곱하기 높이 나누기 2다. 이 공식에 따르면 밑변 10cm에 높이 6cm인 이등변 삼각형의 넓이는 30이다. 하지만, 이 삼각형이 원 안에 있는 삼각형이라면? 밑변 10cm는 원의 지름이 되고, 반지름인 높이는 5지 결코 6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이 삼각형은 존재할 수 없는 삼각형이다. 존재하지 않는 삼각형의 넓이를 구하게 되는 명백한 출제오류다.


우리는 공식을 먼저 알고 수학이란 현상에 접근한다. 이 문제는 어떤 공식을 대입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게 관건이지, 이 현상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근원이나 까닭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틀린 질문에서는 옳은 답이 나올 수 없다. 결국 그가 그동안 대한민국에서 배운 수학은 수학에 접근하는 올바른 방식이 아니란 걸 깨닫게 된다.


대한민국에서 수학을 잘 한다는 건 그의 수학적 사고 능력이 우수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모두가 수학을 잘해서는 안된다. 누구나 명문대를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수학을 포기하는 자들’이 늘어날수록 입시의 변별력이 높아진다. 따라서 우리의 교육은 적당한 녀석들이 대학에 갈 수 있게끔, 절대로 모두가 알아들을 수는 없는 방식으로 수학을 가르친다. 정말 수학을 잘하고 싶다면 중3 때 미리 수학의 정석을 다 떼고 오던가, 선행학습과 족집게 방식의 가르침을 따로 받아야 한다. 그게 아닌 이상 정규 수업만으로 수학을 특출 나게 잘한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수학적 교육이 이루어지는 동훈고등학교 과학관 B103관에서 한지우와 리학성은 이상한 방식으로 수학에 접근하기 시작한다. 바로 ‘엡실론’, 작고도 작은 무한히 작은 한심하고 하찮은 존재의 근원을 찾아 나가는 아무도 시도하지 않는 방법 말이다. 이 방법은 ‘바흐’의 작곡과도 같다. 인류가 멸망해도 바흐 악보만 있으면 모든 음악을 복원할 수 있다고 하는 것처럼, 수학적 끈기와 용기를 배우는 자세와 태도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루트2를 소수점 아래 서른 여덟자리까지 일일이 손으로 계산하는 변태가 되는 것과 같다. 적어도 이는 진정으로 수학과 친밀해지는 길이다.


“그냥 공식 하나 달랑 외워서 풀면 절대 친해질 수 없다.”


“그렇다고 일일이 다 계산을 해요?”


“계산이 중요한 게 아니야. 생각. 공들여서 천천히 아주 꼼꼼하게 생각을 하란 것이지. “


애초에 정해진 답은 없기 때문에 ‘답을 맞춘다’는 것 자체가 옳은 전제가 될 수 없다. “진짜 수학은 발견하려는 노력이며 용기다. 답이 없는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는 화를 내거나 포기하는 대신에 내일 다시 풀어봐야겠다는” 용기, 그 꿋꿋함을 날마다 결정하고 풀어나가는 게 수학이다. 영화 안에서는 ‘연필을 깎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하나하나 꼼꼼히 들여다보며 밤을 세워 한 문제를 대하는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특별한 비법, 공식으로 짧은 시간에 문제를 푸는 입시 수학과 반대의 모습이다.


지우는 수학과 친밀해질수록 용감해진다. 찌질한 모습은 온데 간데없이 사라지고, 수업시간에 수학 문제 출제오류를 밝히기도 한다. 최대한 조용히 살아가길 애쓰던 기존의 삶의 태도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거다. 이들이 배우는 수학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감탄과 경이다. 영화 속 등장하는 오일러 공식이 대표적이다.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숫자들이 연결되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하나하나의 작은 것들이 저마다의 모습으로 모여 있다. 제 모습 그대로로 존재하는 것들을 틀렸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향해 꿋꿋이 살아가는 용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소수는 제 삶을 증명한다.


수학, 나그네를 향해 열려 있는 이상한 문


리학성은 북한 최고의 수학자였지만 자신의 수학 연구가 군사 무기를 만드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데 환멸을 느껴 아들 태연과 탈북한다. ‘자유’를 꿈꾸며 목숨 걸고 온 남한 땅에서 이들 부자는 자본주의와 경쟁사회에서 ‘배려 받을 자’란 딱지가 붙여진다. 말로는 배려지만 이들은 차별 당했고, 남한 사회 뒷편에서 예비 범죄자란 낙인을 받으며 말이다. 영화 속 리학성의 별명이 ‘인민군’으로 불리우는 건 탈북민을 위험한 존재로 생각하는 동훈고등학교 학생들의 무의식적 생각이 반영된 것, 정작 그는 군면제다.


리학성은 닭 모가지를 비틀고 공사장에서 철근을 줍는 일용직 노동자로 전락했고, 태연은 남한에서의 비참한 삶을 견디지 못하고 월북을 시도하다 죽음을 맞이한다. 리학성이 꿈꾸었던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수학’은 존재하지 않았다. 입시를 위한 수학을 가르치지 않는 수학자는 이 땅에 필요하지 않았다.


리학성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가족을 만날 수도 없는 외로운 나그네다. 그는 자신과 남한 사람을 철저히 구분하며 스스로를 더 고립시키는 방식으로 살아간다. “이 나라 건축할 때 벽돌 한 장 얹은 적 없다”며 자신을 대한민국 국민으로부터 철저히 분리하려는 리학성은 쓸쓸히 나그네의 삶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는 지우가 동훈고등학교를 점점 더 낯선 곳으로 여기는 마음과 일맥상통하다. 그런데, 이 디아스포라들끼리 만난다. 바로 이해할 수 없는 ‘수학’이란 언어를 매개로 말이다. 수면 장애로 잠도 제대로 못 드는 리학성은 지우와 바흐 얘기를 한 그 밤 오랜 만에 단잠을 잔다.


리학성이 지우에게 가르치는 ‘엡실론’ 수학은 사실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살을 부대끼며 친해져야 이해가 되고, 이해를 하면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비효율적인 ‘옳은 풀이 과정’이야말로 수학을 수학답게 대하는 방식임을 어필한다. 그가 말하는 ‘옳은 풀이과정’, 즉 증명이란 곧 ‘살아내는 것’이다. 쓸모없고 어리석은 이들의 증명이 가는 길은 삶에 대한 정직과 사랑이다.


이 영화의 가치는 대한민국에서 존재하지만, 그 존재를 지워야 살아갈 수 있는 나그네, ‘디아스포라’의 모습을 ‘수학’이란 소재를 통해 진득하게 담아냈다는 점에 있다.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문화는 보편적이지 않은 자신의 모습으로 서 있는 사람들을 향해 ‘이상하다’는 타이틀을 붙인다. 영화는 ‘그래 우리는 이상해. 너희들과 절대 같아질 수 없는 머글이야’ 라고 당당하게 외치며 자신들이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가 세상을 향한 증명이 될 수 있음을 당당하게 드러낸다.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상함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며 소수자가 저마다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을 하나의 수학 공식처럼 담아내고자 했다는 데서 새로운 시도를 보인 것이다. 이 이상한 나라가 조금 더 섬세하게 그려졌다면 어땠을까에 대한 아쉬움은 분명 존재한다.


지우가 교내 수학올림피아드 시험지를 훔친 범인이라는 오해를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영화의 이상함은 흔들린다. 여기에 리학성이 오일방정식을 풀며, 노벨 수학상을 수상하고 , 한지우 누명의 구원자로 나서며 영화 속 커다란 갈등을 봉쇄해 나가는 방식은 지극히 클리셰적이며 상당히 아쉬운 지점이다. 결국 리학성이 지켜온 ‘이상함’이란 가치 역시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위치에 올라야 만이 그 명맥을 유지하는 게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꼭 세계적으로 저명한 유명한 수학자로 인정받지 않아도, 수학적 친밀함을 이룬다는 게 어떤 건지 보여주는 ‘이상함’이 드러났다면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달라졌을 것이다. 가령 지우 엄마가 자랑스럽게만 여겨졌던 아들 지우가 겪어내야 했던 아픔을 알게 되며, 자신이 허상의 가치를 좇았다는 걸 알게 된다던지, 지우 스스로 동훈 고등학교의 부당함을 발설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투쟁했다든지, 어떻게든 영화가 그리고자 했던 ‘이상한 나라’의 그림을 완성시켰더라면 그 작품성은 훨씬 올라갔을 것이다.


지우야, 너는 이상한 어른이 되었을까?


이 작품에서 이야기하는 담아낸 정직은 ‘출제 오류 문제에 정답을 찾으려는 프레임 벗어나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출제자가 제공하는 소량의 단물이나마 빨아먹으며 살아가기 위해 오류를 풀어내려는 애를 쓴다. 여기서 누군가는 스스로 삶의 끈을 스스로 놓는다. 리학성의 아들 태연은 ‘부를 소유해야, 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이겨낼만큼 우수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 말하는 남한 사회의 자본주의 폐단을 온 몸으로 겪으며 스스로 침잠해버리고 말았다. 너무나 외로운 시간을 견뎌내는 소수자들이 이름마저 지워진 채 어딘가에서 숨죽이며 살아가고 있다.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지독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무엇이 옳은지는 살아내는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우리는 ‘이상하기 때문에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지켜 나가며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용기를 증명한’ 디아스포라들의 이야기를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를 통해 볼 수 있다.


엡실론, 하찮고 쓸모없고 필요 없는 존재라며, 이 세계의 꼬리칸으로 혹은 기차 바깥으로 던져버리는 서늘한 이야기들은 아주 오랫동안 펼쳐졌다. 그러나 우리는 오일러 공식을 통하여 관계없는 것들이 모여 서로의 존재를 외려 증명하고, 공식을 만들어가는 것을 발견했다. 소수들은 결국 살아낸다. 끊임없이 살아냄으로써 자신을 증명해낸다. 그 노래는 결국 ‘원주율의 노래’이자 바흐의 악보로 불리어질 것이다.


열일곱의 한지우가 스물일곱이 되고 서른일곱이 될 세상은 여전히 단단하고 공고한 방식으로 그의 존재를 부정하기 위해 부단히 애쓸 것이다. 그러나, 이미 한번 이상한 나라의 시간을 맛보았던 지우는 충분히 이상한 어른으로 잘 자라나 자신만의 이야기와 노래를 펼쳐나갈만큼 강하여졌으리라 감히 추측하여 본다. 거기에는 차마 살아내지 못했던 태연의 숨결도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