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가 나를 옳은 길로 데려갔던 그 날
IMF로 세상이 시끄럽던 1998년 열여덟의 나희도. 이건 나와는 상관없는 어른들의 일이라 당차게 서막을 시작하는 데 과연 그럴까?
IMF가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세대는 바로 십대다. 노력하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이 순식간에 신기루가 돼버린, 한강의 기적이 끝나버린 최초로 절망을 맛본 대한민국 세대였으니까.
이들 바로 윗세대가 X세대로 자신의 자유로움을 마음껏 표현하며 '오렌지족'이 활보하던 당시와 비교하면
이들은 너무나 빨리 어른이 되어야 했다.
"너의 세계가 사라졌다면 그애의 세계로 가"
시대가 꿈을 빼앗는 시대에 도래했다. IMF 재정악화로 학교에 펜싱부가 없어진 상황. 절망하는 나희도를 향해 채팅친구 인절미(훗날 밝혀지는 이는 고유림)가 하는 말이다. 꿈을 꾸는 게 사치가 돼버린, 어떻게든 현실감각을 찾으라고 속삭이는 세상을 향해 드라마가 제시하는 방법은 더 큰 꿈을 향해 나아가라는 거다.
악착같이 꿈을 빼앗기지 않으려 하는 나희도, 그는 결국 1999년 아시안게임에서 워너비 고유림을 제치고 금메달리스트로 등극한다.
사실 드라마이기에 가능한 발상이기도 하다. 우리의 현실에선 고졸 출신이 메이저 언론사 신입직원으로 뽑힐 확률도, 퇴출 위기에 놓인 펜싱선수가 갑자기 기량이 올라가 국가대표가 되는 기적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이 드라마는 하루 아침에 거리에 나앉은 사람들, 가족의 해체, 순식간에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눈 앞에서 잃어버린 끔찍함이 지워진, 진짜 90년대는 아닌 판타지에 가까운 동화같다. 90년대-2000년대 초반을 떠올리게 하는 이슈들과 오브제들은 등장하나 정말 그 시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필자가 당시 기억력이 팔팔한 십대여서 이때를 꽤나 생생히 기억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그러나 드라마가 매회 꾸준히 던지는 사람을 향한 무한한 위로와 격려가 깊은 울림을 준다. 기본적인 서사가 굵직한 듯 싶으면서도 일상 속에서 경험할법한 외로움, 상처에 대해 세심하게 담아낸다.
그들은 끊임 없이 직면하고 부딪히고 깨지고 아프다.
주인공들은 결국 마주한다. 희도는 그토록 대화하기 싫었던 엄마에게 마음을 열고, 가난이 콤플렉스여서 숨기는 액션을 취해 온 유림은 자기 자신을 팔아서라도 돈이 필요함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된다. 모범생 승완은 부당한 학교 폭력에 대해 침묵하지 않는다.
꿈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패배자'라 명하지 않고 그들이 꿈을 포기하는 것 또한 용기였다고 응원한다. 전교1등 지승완이 교내체벌에 대항하여 자퇴를 하고, 펜싱을 중도에 포기하는 펜싱부원을 그려내는 장면이 그러하다.
직면의 결과가 꼭 성과를 의미하지만은 않는다. 드라마의 결말이 희도와 이진의 이별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너로 인해 내가 빛날 수 있었다'고 고유림이 있었기에 나희도가 있었고, 백이진이 있었기에 나희도가 있었다.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청춘물 속에 사랑을 담는다. 드라마의 전반적인 메시지는 아름다운 청춘과 이들의 뜨거운 심장이다. 연애의 결실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를 옳은 길로 이끌어줄 수 있는 건 비단 자신의 힘과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름답고 빛나는 당신의 별이 있기에 힘들어도 뚜벅뚜벅, 어느 순간 기쁘게 나는 그 곳에 있게 된다. 그런 당신에게 그저 감사할 뿐.
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는, 어떻게 하면 돈 백원을 아낄 수 있을까 골몰하던 가난했던, 때론 신물나게 구질구질 여겨졌던 그때도 청춘은 꿈꾸기를 멈추지 않았고, 꼰대들에게 대항하였고, 믿어왔던 가치관들이 흔들렸던 당대에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끊임 없이 고민하고, 그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다.
모든 것이 무너졌던 그때, 코리안 특급 박찬호와 골프 천재 박세리에 열광하고, 긍정의 가치관이 더 부각했던 건 무너지지 않으려고, 살아가려고 직면했던 사람들의 용기였다.
함께 있을 때 각자의 별은 더욱 빛난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했던 서사는 유림과 가족의 서사였다.
보증을 잘못 서 빚이 늘어난 유림 가족, 유림 엄마는 딸을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오히려 고가의 휴대폰을 유림에게 선물한다. 이딴 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화를 내는 유림에게 네가 이걸 받고 좋아하는 마음이 힘이 된다고 할 때 유림은 마음은 아무런 힘이 없다고 빚 같은 거 갚아줄 수 없다고 한다.
이후, 펜싱부 회식으로 희도가 유림 떡볶이집에 뻘쭘하게 들어온다. 유림을 제치고 희도가 금메달을 따며 오히려 여론이 편파판정으로 희도를 몰아세웠던 그때, 유림 엄마가 희도를 꼭 끌어안으며 위로한다. 어머니의 진심어린 위로로 희도는 그동안 유림에게 서운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진다. 이를 유림에게 말한 희도,유림 역시 마음으로 빚을 갚을 수 있단 말을 이해하게 된다.
그간 드라마에서 갈등 구조로 다투고 싸우는 장면은 험악하고, 말로 사람을 죽이는 것 같아서 보기가 힘들 때가 더러 있었다.
이 드라마는 드라마의 중후반까지 고유림과 나희도의 다툼이 서사의 큰 축을 이루었다. 물론 두 사람도 몰랐던 숨은 우정(채팅 친구)도 있었지만,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고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장면에서 관계가 자라는 서사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 드라마의 '직면'의 힘은 바로 고유림과 나희도에서 시작한다. 서로가 라이벌이어서 행복했다고 말하는 이 건강한 관계가 사람으로 지치고 무너지는 이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힘이되고, 실제로도 그런 관계들이 많이 일어나길 바라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