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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오 Mar 17. 2021

[초록 호흡_5] 나무를 좋아합니다

나무 좋아하는 분, 또 계신가요?

 #1. 

 나무를 바라본다. 그리고 나무에 대해 생각한다. 나무에 관심을 가지고 나무를 관찰하고 나무를 사랑하게 된 지 꽤 오래된 것 같다. 정확히는 오 년 정도 되었나 보다. 오래전부터 좋아했던 나무가 초록의 생명이 뿜어내는 어떠한 생동감 넘치는 기운, 그리고 변함없이 그 자리에 뿌리내리고 사는 용맹함을 견지한 나무 정도였다면, 최근 오 년이라는 시간 속 내가 관심을 두고 바라본 나무의 면모는 조금 다르다. 

 예전에 화면으로만 마주하던 유명 연예인을 실제로 만났던 적이 있었다. 실제로 보니 화면을 보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은 얼굴과 오똑한 코 높이에 놀랐던 적이 있다. 평면의 대상이 입체감을 가진 새로운 존재로 변이해 내게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이게 진짜 내 모습'이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나무들이 내게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저 쉽게 볼 수 있고 산책이나 등산 중에는 더 자주 마주치는 존재. 

 때로는 기대보기도 하고 뭔가 모를 위안을 받곤 했던 나무와 지금 비로소 내가 탐구하는 나무는 확실히 다르다. 마치 신비롭고 경이로운 생명체가 내게 말을 거는 소리를 듣는 것같이 느껴진다고 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까? 나는 가끔 나무란 이 세상을 지켜나가는 정령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 정도로 나무를 진지한 대상으로 바라보는 중이다. 나무의 세계는 결코 배경, 환경, 산소, 생명, 목재 등의 단순한 차원으로 볼 것이 아니라고 어떻게든 설득하고 싶은가보다.




#2. 

 얼마 전 가로수들이 처참한 모습으로 절단당한 것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해 그날로 여러 기사를 뒤지고 가로수를 보호하는 커뮤니티를 찾았었다. 도시계획에서 반드시 필요한 이 가로수는 단순히 미관상 보기 좋으라고 심어둔 생명이 있는 상품 정도일 수도 있겠다만, 상품의 관리 차원이라기에는 몸체 대부분이 잘려 나간 것을 보니 어쩐지 원통했다. 긴 머리가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깎이고 깎여 결국에는 귀에도 닿지 않는 스포츠 머리로 변한 것만 같았다. 물론 전깃줄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절차이고, 그만큼 잘려 나가도 나무들은 해를 거듭하며 자라고 또 자랄 것이다. 그리고 또 잘라줘야 할 것이고. 가로수에 걸맞은 품종을 가져다 심었기 때문일 터. 알면서도 마음이 썩 편치 않았다. 여하튼 가로수는 어쩌면 별 감흥 없는 우리네 바쁜 일상의 배경일 수 있다. 그러나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아스팔트 길과 보도블록 사이에 줄지어 심겨 이런저런 상처를 입고도 묵묵히 생명력을 발휘하는 가로수들은 사실 대단한 존재요, 우리의 벗이다. 소중하고 가까울수록 귀중함을 느끼지 못하고 당연하게 느끼는 것에 대해 잠시 성찰해보았다.  



#3.

 이어 지난해 여름을 떠올린다. 작년이니 큰아이는 다섯 살, 작은 아이는 세 살이었다. 주로 재택근무를 하며 아이들의 등 하원을 직접 도맡아 하려, 아니 해내려 애쓰는 나. 그런 나는 일과 육아의 불분명한 경계 사이에서 외줄 타기를 하기 일쑤다. 그 당시 나는 분명 꽤 지쳐있었다. 긴급 보육으로 잠시 아이를 기관에 보내도 마음이 놓이지 않던 때, 해야 할 일들을 제때 처리하지 못하거나 스스로 정해둔 수준에 못 미치게 일 처리를 할 수밖에 없었던 위기 상황 속에서 예상한 대로 몸과 마음은 지쳐갔다. 내 몸의 모든 에너지가 소진되었던 그 때 그 썰물의 시기가 한 편의 영상이 되어 파노라마처럼 나를 스치고 지나갈 때가 있는데, 그 모든 장면의 배경은 나무라는 자명한 사실에 놀란다. 나와 같이 숨 쉬고 때로는 지치고 때로는 기쁘게 이 땅에 뿌리내리고 사는 존재들. 한 자리에서 조용히 자신의 할 일을 하며 그 생애를 작은 나이테로 새기고 있었을 그 나무들. 치열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모든 날을 겸허히 몸통에 새기는 나무들은 내게 깊은 위로가 되어주었다. 빈 유모차를 끌고 아이를 데리고 가는 길목에 잠깐이라도 서서, 또 노란 유치원 버스가 도착하는 곳에서 조금 떨어져 고개를 뒤로 젖혀서 하염없이 나무를 바라보았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어제 있던 나무가 오늘도 이 자리에 서 있어 주는 것이 고마웠다. 

 그러다 우연히 숲과 나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봤고, 나는 이 세상에 이천 년 또는 사천 년 수령의 '어미나무'의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어미나무들은 이름처럼 숲의 모든 존재들을 돌보는 역할을 감당하는데 혼자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아닌,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 아닌, 그저 메마르고 약한 나무가 있으면 뿌리를 통해 탄소와 영양분을 전해준다고 한다. 그러니까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발밑, 그러니까 땅 밑으로 말이다. 뿌리와 토양의 망을 통해서 그런 일들을 한다고 했다. 그 엄청난 연쇄 관계를 알게 된 후부터 아이들을 데리러 가고 오는 길에 마주치는 나무들이 더욱이 그냥 보이지 않았다. '엄마'로서의 역할을 응원해 주는 묘한 기운을 느끼며 기운이 났다.



#4.

 문득 나무에 대한 나의 시선 변화를 돌이켜본다. 그냥 좋은 것과 너무 좋아서 연구하고 싶은 것은 분명 다르다. 겉으로 드러나는 외형이나 색을 좋아하는 것과 그것이 이뤄지고 짜인 구조와 원리를 속속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또 다르다.

 나무의 세계를 마음껏 활보하며 그들을 탐구하고 싶어 안달 난 내면의 자아로 인해 오늘도 하염없이 내 시선의 많은 부분이 나무를 향한다. 나무를 진지하게 알아보고 싶은 마음에 사 모은 나무 책들, 나무에 대한 그림책들 역시 꽤 된다. 물론 다 읽지는 못했다. 너무 좋아하고 아껴서 쉽사리 손을 대지 못하는 이 심리는 대체 무엇이던가.

 최근의 나를 만나 제법 깊은 대화를 나눈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가 가진 '나무 사랑'을 알 것이다. 하도 여러 번 들어서 좋아하는 걸 아니 이제 그만 얘기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 웃음이 난다. 그런데 앞으로 더 많이 얘기하게 될 것 같다. 그저 그렇게 끝날 만한 애정이 아니기에. 또 뭐랄까, 나무는 내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렸고 앞으로 더 깊이 우정과 신뢰를 나눌 대상이 될 거라는 확신이 있기에. 일단 내가 나무에 대해 얘기를 나눈다면 그 대화 속에는 '나는 당신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요.'라는 바람을 전하고 있는 것이라 알아주어도 좋겠다.

 고백하는 마음으로 쓴 나의 나무 사랑에 대한 글이었다.

 이후에는 더 자세한 나무 이야기를 쓸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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