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고양이 중에 가장 이상한 고양이
첫 만남부터 좀 이상하긴 했다. 어린 고양이는 낯선 사람들에 의해 낯선 곳으로 옮겨지면서도 절대 울지 않았다. 두려움인지 호기심인지 모를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가만히 어둠을 응시하는 고양이의 모습에 나는 이 고양이가 어디가 아픈 건 아닐지 내내 걱정이었다.
그리고 우리 집에 온 지 이틀 뒤. 녀석은 내 우려 따윈 가소롭다는 듯 다이소표 방묘문을 발로 차며 요란스러운 소리로 울음을 토했다.
갑자기 나타난 움직이는 하얀 물체
아홉 살, 열 살, 여섯 살 된 고양이들 눈에 덕구의 첫인상이 어땠을까. 덕구를 데려오기 전에 나는 덕구의 적응력을 걱정했는데, 막상 합사를 시작하고 보니 적응을 해야 하는 건 덕구가 아니라 나머지 고양이들 쪽이었다. 덕구는 매일 문을 열어달라고 소란을 피웠고 잠깐 열어주면 거실을 뛰어다니며 자유를 만끽했다. 짧은 다리로 형아들의 식탁을 탐하고 형아들의 장난감을 탐했다.
그 사이 나머지는 덕구를 감시한다.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하얗고 이상한 물체를 어떻게든 파악해버리겠다는 기세로. 이 고양이 탐사대는 철저한 분업 시스템 아래 덕구가 머물렀던 방의 냄새를 맡고(모모), 덕구를 따라다니고(리찌), 멀리서 이 모든 상황을 지시하며(쿤) 사태 파악에 나섰다.
덕구는 충분히 탐구의 대상이 될 만하다. 단지 어리고, 새로운 생명체여서가 아니다. 내가 이 고양이에게서 느끼는 '이상함'을 우리 집의 다른 고양이들도 느낀 것이 분명하다. 녀석을 며칠 동안 지켜본 나는 단순히 어린 고양이의 치기, 미숙함 외에 다른 것을 느꼈다. 그것을 단어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확실한 건 이 고양이가 보이는 많은 모습들이 고양이보다는 '개'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고양이 점수 20점인 고양이
고양이의 '고양이다움'을 생각해봤을 때 100이 가장 고양이에 가까운 성향이라면 내 기준 모모는 90, 쿤이는 70, 리찌는 40, 덕구는 20이다. 다시 말해 덕구는 그동안 내가 살면서 본 고양이 중에 가장 '안' 고양이스러운 고양이랄까. 특히 고양이 특유의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 경계심, 예민함 부분에서는 0점이다. 예쁘다고 하는 사람의 손길은 피한 적이 없고 모르는 사람 앞에서도 배를 벌떡 내놓고 잘만 잔다. 곁으로 다가갈 때마다 싫다고 휘젓는 냥펀치에 이마를 퍽퍽 맞으면서도 매일 첫째 형께 문안인사 드리러 가는 뻔뻔한 낯짝도 영 고양이답지 못하다.
그러니 지극히 고양이답게 품위를 지켜온 다른 녀석들에게 이 녀석이 곱게 보일리 만무하다. 혼자만의 고독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방해하질 않나 아무데서나 발라당 배를 까고 누운 모습은 천박하기 짝이 없다. 나 또한 나이 많은 고양이들을 키워오면서 그간 우리 집이 참 '평화롭다'고 느꼈었는데 덕구의 등장 이후로 평화와는 거리가 먼 낮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고양이 점수 상위권인 첫째 형 쿤, 셋째 누나 모모에게 이 고양이는 눈치 없고 막돼먹은 존재다. 그나마 모모는 종종 곁을 내 주기도 하지만 쿤이의 날선 경계는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 고양이들은 덩치가 커 보여서 하얀 고양이를 싫어한다던데. 흰색에다 장모인 덕구가 너무 커 보이는 걸까? 서열 1위(쿤)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간다. 눈치도 없고 덩치만 커서 위협적인 흰 덩어리가 눈엣가시일 수밖에.
반면 집사에게는 이 뻔뻔하고 당돌한 점이 가산점이다. 기죽지 않는 당당함, 경계 없는 사교성, 모난 부분 없이 둥글둥글한 착한 마음. 덕구는 한동안 흔히 말하는 '꼬드름' 때문에 치료 기간을 겪었는데 이 기간 동안 나의 마음을 완벽하게 사로 잡았다. 그동안 나는 고양이들이 아플 때 '약'을 먹이는 것에 대해 거의 반포기 상태였다. 그런데 이 녀석 만큼은 맨손으로도 투약이 가능한 것이었다! 연고를 바를 때나 발톱을 깎을 때도 마찬가지. 살벌하게 버둥대고 으악대는 다른 고양이들과는 달리 덕구는 너무나도 얌전히 몸을 맡긴다.
얼굴천재 별명부자 조덕구
타고난 천연덕스러움과 태평함으로 무장한 이 고양이는 예상보다도 훨씬 빨리 우리 집에 적응해나갔다. 그간 세 마리의 고양이를 키우며 고양이의 유년기가 바람보다 빠르게 지나간다는 것을 이미 경험하였음에도 유독 덕구의 변화는 충격이었다. 털은 같은 장모인 모모보다도 훨씬 길고 풍성해져서 웬만한 중형견 못지 않은 덩치가 되어버렸고 얼굴은 두 살인 지금까지도 성장을 멈추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별명도 많이 늘었다. 강호동, 고창석, 마동석.
덕구가 털이 풍성한 몸을 뚱실거리며 걸어다니면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오는 강아지 '힌'이 떠오른다. 구름 같은 몸으로 공중을 부유하듯 스스스스 걷는 나의 고양이. 남편은 어디 하나 닮은 구석이 없다고 하지만, 내가 봐도 사실상 닮은 거라곤 축 쳐진 털 뿐인 것 같지만, 어쩐지 이 녀석을 보면 소피 옆에 붙어서 의뭉스럽게 걷는 힌이 자꾸만 떠오르고 만다.
남편은 매일같이 덕구와 눈이 마주치면 '으이구 못생겼어~'라고 타박이다. 못생긴 건 인정. 그치만 나는 이 편이 훨씬 더 귀엽다. 매일 아침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게 되는 미친 귀여움. 누가 뭐라고 해도 절대 기죽지 않는 당당함과 너그러움을 갖춘 대인배. 강아지가 갖고 싶었던 어린 시절 내 꿈과 고양이 쪽이 더 편해진 지금의 내 니즈를 정확히 충족하는 완벽한 개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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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고양이 D
2019년 6월 30일에 태어난 하이랜드폴드
네 마리 고양이 중 막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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