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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야옹 Mar 03. 2024

화생방 독서

 작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그리 길지 않은 평생 딱 한 번 대학교 졸업식 축사를 했습니다. 그의 축사는 물고기와 물의 우화로 시작합니다.


 어린 물고기 두 마리가 물속에서 헤엄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나이 든 물고기 한 마리와 마주치게 됩니다. 그는 어린 물고기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넵니다. "잘 있었지, 얘들아? 물이 괜찮아?"

 어린 물고기 두 마리는 잠깐 동안 말없이 헤엄쳐 가다가 결국 물고기 한 마리가 옆의 물고기를 바라보며 말합니다. "도대체 물이란 게 뭐야?"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이 일화를 인용해서 나이 든 현명한 물고기인 양 어린 졸업생 물고기들에게 물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듯, 나도 물이란 이러저러한 것이네 하고 깨달은 사람 행세를 하려고 이 연설을 끌어온 것은 아닙니다.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가는 방법, 즉 독서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이고 이기적인 관점을 제시하고, 물속이 아니고서야 살 수 없는 주제에 자꾸만 물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물고기로서 오늘날의 출판 트렌드에 대해 불평불만을 늘어놓아보려 합니다.


서가는 온통 에세이 일색, 출판이 쉬워진 이 시대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킨 에세이집이라고 하여 펼쳐 보면 고급스럽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유려하게 적어 내려간 SNS 캡션 묶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경우가 최근 너무나 많습니다.


 독서의 목적은 곧 물에서 끌려나가 육지에 패대기 쳐지는 것입니다. 비늘이 뜯기고, 아가미가 말라비틀어지고, 지느러미에 상처를 입고서 간신히 물에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깨닫는 것입니다. 당연히 여겼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고 의문을 갖지 않았던 것들이 의심스러워지는 과정입니다. 책의 첫 페이지를 펼쳤을 때의 나와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닫을 때의 나는 다른 사람이어야 합니다. 상처를 입거나 어딘가가 파이고 깎여나가야 합니다. 그 자리가 새로운 깨달음으로 채워질 필요까진 없습니다.


 언젠가부터 서점의 매대는 대 연민의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소설도 에세이도 페이지마다 불행하고 상처 입은 이에 대한 호소와 연민이 어찌나 가득한지 모두가 관자재보살의 화신이라도 된 듯한데, 가여워 흘러넘치는 감정의 파도에서 초보 서퍼처럼 서핑보드를 겨우 붙들고 잘 둘러보면 그 연민과 동정은 중생이 아니라 작가의 내면을 향하고 있습니다. 각자의 물 안에서 내가 이렇게 상처를 입었고 저렇게 다쳤고 그래서 가여운 피해자가 되었다는 물고기가 수두룩합니다.


 가녀린 로맨티시즘이 통렬한 현실의 벽에 부딪치면, 로맨티시즘이 아닌 다른 것으로 변화하지 않고서는 대개 극복할 수 없기 마련입니다. 차라리 부딪쳐 부서지거든 그리스 비극 속 영웅의 몰락처럼 비장하기라도 할 텐데, 부서지기를 두려워하는 현대의 여리디 여린 로맨티시즘은 부딪치는 것마저도 거부합니다. 84일째 한 마리도 낚지 못했다는 도입부에 이어 '그래서 그는 마음에 상처를 입고 집으로 돌아와 이불에 몸을 감고 웅크리고 누워 라디오 야구 중계를 들으며 그래도 조 디마지오는 홈 플레이트를 향해 달린다는 데에서 작은 위안을 얻었습니다'라고 전개되는 <노인과 바다>랄까요. 기백이 실종된 글은 누군가에게 일시적 위로가 될지 모르나, 책에게 크게 얻어맞고자 하는 마조히즘적인 욕구를 안고 페이지를 넘기는 독자에겐 그저 공허할 따름입니다. 무겁고 고통스럽게 내리치는 깨달음을 찾기가 너무도 어렵습니다.


곱게 디자인된 산문집의 절대다수가 잠깐 지하철의 몇 정류장을 견디는 사이 SNS에서 엄지로 스크롤을 내려 읽는 정도의 깊이일 뿐입니다. 그 자리에서는 문장을 참 잘 쓴다며 감탄할 수는 있겠지만 내 비늘에는 아무런 자국도 남지 않습니다. 화생방 가스의 분자처럼 독자의 뇌 주름에 갈고리를 걸고 들러붙어서, 의도적으로 털어버리지 않는 한 그 자리에 남아 지속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환기시키는 주제나 문장이 없습니다. 예쁘다고, 잘 쓴다고 말하고 돌아서면 잊어버릴 글, 내게 흉터를 남기지 않는 글뿐입니다. 며칠에 걸쳐서 밤마다 엎치락뒤치락하게 만드는 문장, 다른 이에게 그 책을 설명하려고 할 때마다 격렬한 감정이 먼저 차올라서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게 만드는 사유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책이라는 매체에 극도로 보수적이고 소위 꼰대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런 풍조를 타고 등장한 자기 연민과 비대한 자아로 가득 찬 에세이들이 잔인한 낚싯바늘 같고 불에 달군 망치 같으며 화생방 가스 같은 글과 마찬가지로 '책'이라는 명칭을 단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괴로운 것입니다.


 반드시 거창한 깨달음을 주어야만 책으로서의 가치가 있는지 반문하고 계실 수 있습니다. 그저 같은 고통을 겪은 사람과의 연민을 통한 유대를 느끼는 것만으로 '소소하고' '마음을 어루만지는' 에세이가 가치 있지 않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SNS 글 정도의 깊이만을 가져도 '괜찮다'라고, 요즘의 수많은 에세이가 만트라처럼 반복하듯이 그래도 괜찮지 않냐고 반박할 수 있습니다. 작살처럼 찌르는 책은 고통스럽습니다. 일상이 무겁고 부담스러우면, 지치고 피곤한 시간에 위로를 바라고 책을 집어든 사람이라면 텍스트의 세계에서조차 상처받고 싶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렇습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책을 사랑해 마지않지만 <나를 보내지 마>는 가지고 있는 것조차 괴로워 중고로 팔아 버렸을 정도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반박에는 괜찮지 않다고 답하겠습니다. 레이 브래드버리가 <화씨 911>에서 외쳤듯이 우리는 서로를 좀 더 귀찮게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좀 더 고통스러울 필요가 있고, 좀 더 깊이 사유할 필요가 있고, 물 밖으로 내던져져서 여태껏 보지도 느끼지도 못했던 세계의 측면에 눈뜰 필요가 있는 존재입니다. 매일의 사소한 위로와 공감만으로 만족하고 거기에서 멈추기에는 인간의 지성이 너무 아깝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오늘도 화생방 같은 경험을 시켜 줄 책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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