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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야옹 Feb 27. 2020

보르도 공항 그리고 기후의 첫인상

파리 말고, 프랑스 (2) 유명 와인 산지의 기후적 공통점?

8세기부터 시작한 보르도 와인의 역사


프랑스 남서쪽, 대서양으로 흘러가는 갸론Garonne 강을 끼고 자리 잡은 항구 도시가 있다. 달의 항구라는 별명을 지닌 보르도Bordeaux 시이다. 인구는 2019년도 조사에 따르면 시내 기준 약 26만명. 주변에는 뻬싹Pessac, 메리냑Merignac 등 와인 기웃거려본 사람이라면 이름이 익숙할 작은 마을들을 끼고 있는데, 이런 위성도시와 외곽 지역을 죄다 포함하면 인구가 순식간에 78만명 수준으로 뻥튀기된다. 누벨 아키텐 Nouvelle-Aquitaine 레지옹의 주도이며 지롱드 Gironde 주의 주도이기도 하지만, 파리처럼 화려하다기보단 우아한 편이다 (파리에 가본 적도 없으면서 잘도 이런 소릴!) 차분한 베이지색과 짙은 청색이 건축의 주조를 이루며, 심지어 도시 한복판을 한강처럼 가로지르는 갸론 강마저 황톳물이라 반짝이는 면은 없다. 그러기에 질리지 않지만, 와인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굳이 갈 만한 관광지인 것도 아니다.


아름답단 말은 나오기 힘든 갸론 강


보르도 공항은 초라하고, 곳곳에서 보이는 와인의 레퍼런스는 그다지 매력적이지도 않다. 유명 와인 산지이니 억지로 여기저기 와인 광고판을 달아두기는 했으되 조화를 이루지는 못한다. 투박하기로 따지자면 미국의 소규모 지방 공항과 비슷한 수준이다. 짐을 찾으러 내려갔다가 마주친 거대한 분홍색 끄레망Crémant (샴페인처럼 발포성인 와인이지만 샹파뉴 지역에서 생산되지 않는와인을 통칭하는 이름이다. 유명 와인 웹진 <와인 폴리>에서는 끄레망을 두고 "맥주 예산으로 샴페인을 마시고 싶을 때" 좋다고 설명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의 주류세 앞에서 맥주 예산으로 끄레망이란 어림도 없는 소리다) 병 모양 조형물은 너무 느닷없다 못해 폭력적일 정도로 시선을 잡아끌었다. 생기 없는 무채색 벽과 지극히 실용적인 컨베이어 벨트 형태의 카루셀 앞에서 그 분홍색 병은 좋지만은 않은 의미로 눈에 띄었다. 놀랍게도, 혹은 슬프게도, 저 분홍색은 패키지가 분홍색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칼베Calvet의 로제 와인 병은 투명하다. 즉 로제 와인의 황금빛 도는 은근한 장미색이 저런 샴푸 패키지 겉면 색상 같은 분홍색으로 표현되고 만 것이다. 뇌물을 받지 못한 화가가 앙심을 품어 실제보다 훨씬 못나게 초상화를 그렸고, 그 탓에 그녀가 추녀일 것이라고 오해한 황제가 흉노에게 보내는 후궁으로 골랐다가 실물을 보고는 땅을 치고 슬퍼했다는 왕소군의 일화가 생각난다. (전한의 원제는 이윽고 슬픔이 분노로 변해 화공의 목을 쳤다고 하지만, 설마 문명화된 프랑스에서 칼베의 소유주가 이 조형물 제작자의 목을 쳤을 것 같지는 않다)


문제의 분홍색 거대 와인병
칼베 끄레망의 실제 모습

 

프랑스 전역에 유명 와인 산지가 포진해 있다보니 빛이 바래기는 해도, 보르도 근방에는 전설적인 와이너리가 포진해 있다. 샤토 라투르Château Latour, 샤토 마고Château Margaux, 샤토 라피트 로쉴드Château Lafite-Rothschild, 샤토 무통 로쉴드Château Mouton-Rothschild, 샤토 디켐Château d'Yquem 등, 몇 궤짝만 쌓아 올려도 우리집 전셋값에 맞먹을 어마어마한 와인들이 이 땅에서 생산된다. 


보르도 지방에서 와인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무려 8세기 경부터였다고 한다. 여기까지 진군한 로마군들이 진지를 세운 다음, 당연하게도, 한바탕 힘을 썼으니 술 생각이 간절했던 모양이다. 보르도와 그 인접 지역을 돌아다니다보면 로마 시대 유적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으며, 로마인들이 터를 닦아둔 포도밭을 놀랄 만큼 흔하게 마주칠 수 있다. 어떻게 그 옛날에 과학적인 농법도 없이 포도 농사가 잘 되는 땅을 기가 막히게 골랐는지 감탄이 나온다.


보르도는 주인이 바뀌는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다. 로마인들이 드나든 것은 약과이고, 12세기에는 알리에노르 다키텐 여공작이 (이 유명한 분의 이름에 들어있는 "아키텐"이 위에서 언급한 "누벨 아키텐"과 이어진다) 영국의 헨리 플랜태저닛과 결혼하면서 거의 3백년 가까이 영국의 통치를 받았다. 영국령이던 시절 보르도는 전례 없는 번영을 누렸다. 이전까지는 바이킹이며 반달족 등의 침략을 끊임없이 받아 왔지만 영국 해군들이 전력을 다해 보르도 항구 주변의 해역을 사수해 (그들도 마시고 싶었겠지), 영국에 대량의 와인을 내다팔 수 있었기 때문이다. 1453년 카스티용 전투 후 다시 프랑스령이 된 보르도는 프러시아와의 전쟁통에, 그리고 제 1차 세계대전과 제 2차 세계대전 도중에 파리가 함락의 위기를 맞으면서 프랑스의 임시 수도로 기능하기도 했다.


그렇게 화려한 과거를 안고 구시가지 일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한 보르도의 첫인상은... 캘리포니아!


거기서 캘리포니아가 왜 나와?


아니, 건축이나 도시 계획처럼 인간이 손댈 수 있는 영역에서는 당연히 다르다. 180도 다르다. 유럽에서 소속이 여러 번 바뀐 무역도시들이 흔히 그렇듯이 창고 건물마저 고풍스럽고 시내에는 유럽 명품 브랜드의 잡지 화보에나 나올 것 같은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보르도의 건축과 도시 생태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아 한 편을 따로 할애해서 다뤄야 한다. 그렇지만 사람이 관여하지 않는 '날씨'라는 영역에 있어서는 놀라울 정도로 기시감이 든다. 아마도 공항에서 나와 보르도 시내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7박 9일의 여정 동안 수십 번도 더 여기 날씨가 꼭 캘리포니아 같다는 말을 했던 것 같다.


당연히 캘리포니아는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기에, 전역에 걸쳐 기후가 동일하지 않다. 내가 가 본 곳은 태평양에 인접한 로스앤젤레스와 산타모니카 일대에 불과하다. 그런데 출장 차 LA에 들를 때마다 느꼈던 날씨의 특징이 보르도에서도 상당 부분 비슷하게 다가왔다. 아래 내용은 와인 전문가나 소믈리에의 검증을 거친 게 아니라 와인에 이제 막 눈을 떠 가는 먹보의 감상임을 미리 밝혀둔다.


무자비한 햇살

보르도도 로스앤젤레스도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본능적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태양이 너무 강해서이다. 피부를 뚫고 몸 속으로 내리꽂히는 듯한 햇살은 9월이라고 해서 기세가 꺾이지 않는다. 캘리포니아 사람들이 그렇듯 남프랑스에서도 운전을 할 생각이 있다면 선글라스가 필요하다. 자외선 차단제는 운전을 하지 않더라도 필요하다. 특히 포도밭 투어를 할 생각이라면 지평선 반경 수십 킬로미터 내에 나무 한 그루 없어 엄폐물이 전무하니 자외선 차단제를 잘 바르고 모자 등의 방어구를 챙겨야 한다. 수백 장의 사진을 휴대전화로 찍었는데, 솔직히 햇빛이 너무 강력해 액정이 보이지 않아 반 이상은 그냥 감으로 찍었다.


엄청난 일교차

낮에는 무자비한 햇님 덕택에 정수리가 타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덥지만, 해가 질 때가 되면 갑자기 서울의 10월 중하순만큼이나 추워진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언제나 출퇴근 시에는 단단히 기모 후드티와 데님 재킷을 챙기고 그래도 추워했는데 보르도도 사정은 비슷했다. 보르도는 2019년 9월 기준으로 최고기온은 22-24도 내외, 최저기온은 10-11도 내외를 기록했다. 해가 강해 낮의 체감온도는 더 높고, 바람이 많이 불어 밤의 체감온도는 더 낮다. 여행자를 감기 들게 하려고 작정한 듯한 일교차이다.


입술이 바작바작 마르는 건조함

캘리포니아는 전체적으로 비가 거의 오지 않는다. 처음 출장을 갔을 때 야외에 설치해 둔 소파와 의자들을 보고 비가 오면 저걸 다 누가 들여놓냐고 물었다가 현지 동료들의 귀엽다는 시선을 받았는데, 아니나다를까 비에 익숙하지 않은 이 친구들은 2019년 봄 로스앤젤레스에 폭우가 내리자 와이퍼 단계 올리는 법도 모르는 어수룩함을 보여주었다. 와인으로 유명한 소노마Sonoma가 1년 강수량을 다 합쳐서 간신히 747mm가 나오는데, 2017년의 폭우로 서울에 7월 한달에만 500mm가 넘는 비가 내렸던 것과 비교하면 새발의 피가 무엇인지 단박에 이해가 간다.


애초에 사막으로 분류되는 캘리포니아에서도 바다와 가까워 안개와 습기가 밀려오는 소노마, 나파 등의 유명 와인 산지는 로스앤젤레스나 산타모니카보다는 습하지만, 한국식의 습기와는 개념이 약간 다르다. 한국은 여름철 뜨겁게 습한 동남아 스타일인 반면 이 지역들은 여름은 정작 건조해 나기 쉬우면서 겨울이 습하다. 겨울비 내리는 날 뼛속까지 으슬으슬하게 추위가 스미는 것과 유사한 느낌이다.


보르도와 그 일대는 항구 도시이기에 당연히 바다의 영향을 받으며 상대적으로 습한 편이지만, 강수량은 한국에 비하면 대단히 적은 수준이다. 흥미롭게도 11, 12월에 가장 비가 많이 오며 7, 8월이 가장 건조해, 장마철에 비가 폭발적으로 내리는 한국과는 정반대의 양상을 띤다. 국가수자원관리종합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019년 기준으로 한국에는 7월에 210mm의 비가 내렸다. 전년도에는 8월에 276mm가 내렸으니 가물었던 셈인데, 같은 해 메떼오프랑스의 자료에 따르면 보르도에는 11월에 가장 비가 많이 왔으며 그것도 110mm에 불과했다.

척박하다는 말이 절로 튀어나오는 포도밭의 건조하고 거친 토양. 사진은 샤토 피숑 바롱의 포도밭.

호텔 방은 세계 어디를 가도 건조하기에 늘 립밤을 챙겨 다니지만, 남프랑스 여행 내내 립밤을 달고 살았다. 그래도 여행자의 입장에서는 습하거나 비가 오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이렇게 건조하면 포도 농사가 과연 되기나 할까 싶으나 사실 비가 덜 오면 포도나무는 잎과 덩쿨을 포기하고 열매에 양분을 집중한다고 한다. 건조한 지역일수록 열매에 맛이 든다는 의미이다.


어쩌면 이렇게 닮은 점이 많기에 캘리포니아에도 세계 정상급 와인 산지들이 포진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즉, 구대륙 와인 산지의 기후를 닮은 신대륙의 땅에 도전정신 강한 애주가들이 와이너리를 세워 성공한 것이고, 나처럼 신대륙을 먼저 방문했던 사람은 구대륙에 도착해 놓고서는 보르도 날씨가 캘리포니아 같다며 호들갑을 떨게 된 것이다. 이런, 생각해 보니 보르도 사람이 들으면 앞뒤가 바뀌었다며 기분 나빠했을 감상일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프랑스어 한 마디

캬페 café

캬페오레 café au lait


프랑스에서는 커피에 대한 시각을 약간 바꿔야 했다. 아메리카노와 카페라떼에 익숙한 사람은 각각 커피, 우유 넣은 커피에 해당하는 위 단어들이 전자와 후자에 대응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하루 세 잔 커피를 마셔줘야 작동이 되는 나 같은 인간에게 프랑스에서 커피 주문하기는 약간의 시행착오가 발생하는 과정이었다.


프랑스 여행기들을 읽다 보면 캬페를 주문하면 에스프레소가 나온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캬페오레의 정체가 아직 불명료해보인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카페라떼를 주문하면 맛이 없고 밍밍하다는 후기가 많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캬페오레는 카페라떼의 동의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먹는 스타벅스 스타일의 카페라떼는 에스프레소 샷을 스팀 밀크에 넣어서 만든다. 당연히 온도가 훨씬 높고, 물이 적게 들어가니 맛이 진하다. 반면 프랑스식 캬페오레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아메리카노에 따뜻한 우유를 (스팀 밀크도 잘 안 쓴다) 붓는 것이다. 물 반 컵 이상이 들어간 카페라떼인 셈이다. 덜 따뜻하고, 싱겁다. 개인적인 호불호를 말하자면 솔직히 맛이 덜하다. 프랑스에서 학위를 받으시고 오랫동안 생활하신데다 현재도 업무상 거의 일년의 절반은 프랑스에서 보내시지 않으신가 싶은 대표님 말씀이, 보통 아침식사에 곁들이는 이미지란다. 그래서인지 프랑스 스타벅스에서 캬페오레를 주문하면 싱겁고, 카페나 음식점에서 주문하면 사발만한 그릇에 나온다. 카페라떼를 기대한 사람들로부터 불만이 나올 만하지만 사실 같은 음료가 아닌 걸 어쩌랴.


에스프레소와 발로나 초콜릿 조합만으로 행복하다
대충 만든 듯한 머랭을 주면 커피에 띄워 먹어도 즐겁다

대부분 식사 후 후식으로 마시는 건 캬페이다. 나는 현지에서는 현지식을 먹는 걸 좋아하므로 항상 캬페를 주문했고, 조그만 에스프레소 잔에 각설탕을 통 떨어뜨려서 휘휘 저은 다음 적당히 식었다 싶을 때에 홀짝거리는 데에 재미를 붙였다. 게다가 후식으로 캬페를 주문하면 대부분의 음식점이 머랭이나 초콜릿을 같이 주어서 쏠쏠한 즐거움이 있었다. 사실 에스프레소가 의외로 카페인이 적다고 하니, 맛이 좀 진한 커피를 마셔도 괜찮은 타입이라면 에스프레소와 설탕 조합에 도전해 보자. 엉 캬페 실부쁠레 라고 말하면 조그만 잔과 설탕, 초콜릿을 가져다 줄 것이다. 계산을 마치고 그 커피를 천년만년 마시고 앉아 있어도 아무도 내쫓지 않는다. 프랑스인에게 식사는 신성한 시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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