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찍질
"읍" 하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버벅대다 겨우 눈을 떴다. 똑딱거리는 시계 침 소리가 적나라하게 귀에 박혀 들어오고, 나는 갈팡질팡 해진 마음을 가다듬고 잠시 앉아있었다. 지난밤 꾼 꿈, 그 꿈이 온 사고를 점령하며. 그건 아주 찌뿌드드하고 꺼림칙한 자책감(自責感)의 꿈이었다.
꿈에서 난 시를 발표하기 전, 강단에 서 있었고, 사람들의 다소곳한 눈빛은 모두 나에게로 쏠려 있었다. 나는 무척 즐거웠고 한껏 설레었다. 첫 문장부터 문장이 끝날 때까지, 시의 낭독은 늘 나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기에. 꿈이라고 다를 바는 없었다. 나는 사람들이 나의 시 낭송을 기다리며 오손도손 대화를 주고받는 작은 목소리도 좋았다. 거기다 곳곳에 기대하는 의견도 적잖이 들리니. 나는 그 광경에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쓴 시를 제대로 발표할 심정이었다. 그런 생각이 미치자 얼굴에 웃음꽃이 피고, 내 발걸음은 성큼성큼 강단 앞을 걸어가게 되었다. 또각또각 구두의 소리. 그 소리는 화려하게 흐트러졌던 이목을 보란 듯이 집중시켰다. 그리고 단상에 서 사람들의 눈빛을 만끽하며. 나는 잔기침을 괜스레 떠들썩하게 했다. 그리고 곱슬머리를 뒤로 넘기고 잔뜩 차려입은 원피스에 한껏 으스대며 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맨 뒷자리 쪽 사람들이 씩씩거리며 하나, 둘씩 벌떡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정확히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 표절했지? 내가 봤어!" "표절했어, 그래 표절이야!" "어디서 본 적이 있어!" 사람들이 한꺼번에 조롱 섞인 소리로 외쳐 대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나의 얼굴을 붉게 만들더니,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게 했고. 급기야 두껍게 바른 화장 분 사잇길로 눈물이 뚝 뚝 떨어졌다.
그 순간에 나는 눈이 확 떠진 것이다. "별거 아닌 꿈이야" 하고 혼잣 말로 스스로 위로했지만 나의 눈동자에 서러움이 서려있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헛헛함이 묻어있는 눈을 세게 문질렀다. 그리고 허리를 곧추세운 뒤, 그대로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 조명을 켰다. 어젯밤에 쓰다 만 시. 마음에 들지 않는 시를 작정(酌定)하여 다시 창작할 셈이었다. 나의 세계관을 실은, 독창적 사고의 자유 항해만을 맹세하며. 글의 존재 의미는 자신만의 것이어야 존중되는 것이기에.
하지만 역시나 시를 써 내려가는 곳곳, 나의 자아를 뭉개는 내면의 소리가 간담을 써늘하게 하며 들려왔다. '너의 글은 보잘것없어!' '좋은 글을 쓰기가 힘들 거야!' 마치 그 잔인한 소리는 멈추지 않는 미로를 떠도는 것처럼 눈앞을 아른거렸다. 그러니 잡념이 밀려 머리가 지끈대고 시상(詩想)이 열리지 않고 떠오르지도 않는다. 그래도 어떤 기교를 쓰더라도 곁에 두고 싶은 시는 몇 자 긁적거리게 하더니, 또 생각의 감기가 걸려 단어가 콜록거리며 멈춰 섰다. 나의 시 착상은 늘 그렇게 해수면의 지평선처럼 닿지 못하고 바라보게 되니. 하지만 그러다가도 끝없는 자신과의 대화 속, 미미한 생각도 다듬기를 반복하고. 그래서인지 부담감에 적으려는 시의 경로는 매번 이탈했다.
그런데, 문득 우연히 잡지에 실린 거대한 글들이 떠올랐다. 자신만의 애환을 녹인 감동적인 시상(詩想)들. 춤을 추는 단어 속 멋들어진 문장의 향연. 그 시들은 마치 자유의 날개를 달고 손 닿지 못한 이상향 같기만 하다. '나는 왜 그런 글을 쓸 수 없을까? 하늘과 구름, 햇살은 모두에게 공평한데 내가 쓰면 감명을 줄지 만무하다' 그런 나의 생각은 낯선 타인처럼 섬뜩하게 하고. 그리고 갑자기 글을 조금이라도 훔치고 싶은 욕망마저 꿈틀댄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바로 그 끔찍한 생각을 트집 잡듯이 '허락하지 않는 구절을 도용하게? 유혹에 쉽게 당하게 놔둘 거 같아? 네 멋대로 남의 표현을 가지고 놀게 둘 수 없어!' 하며 비판의 나는 굴복시킬 수 없는 사고(思考)로 나를 바로 세운다. 아마도 덧없이 회자(膾炙)되어도 좋으니 글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 그 마음 하나로만 가니 그런 생각도 든 것이다. 그건 주목을 끌어 명성을 얻고 싶은 욕구가 금기를 깨고, 시궁창에 혀를 내민 쓰레기보다 마음이 정갈하지 못했다.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수법이 절대 통할 리가 없다는 것을. 어디서나 교묘한 술책은 독자에게 울림을 주지 못할뿐더러 책의 안과 밖에서 샅샅이 뒤져 망신을 줄 게 분명했기에. 그리고 나의 글에 대한 정체성도 순간순간 거짓으로 물들며. 더불어 채신머리없는 글과는 독자들은 소통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의 창작이란 매번 그 사람의 순정과 같기에. 타인의 순정을 짓밟은 부도덕으로 무슨 이득을 바랄까.
나는 다시금 타인의 글을 내 것처럼 삼고,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읊조리며. 내 글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족한 글이라도 부축해서 나아갈 것이다. 그건 자라나는 나의 글 밭에 다시 창작의 비료를 뿌리고, 여백의 종이를 순수함으로 키워내며. 그까짓 것 기대치를 없애고 부러움이란 중압감을 떨쳐버리면 될 일이다. 머릿속의 어딘가는 절대적 경험치가 녹아있으니. 끝이 어떻게 돌아가든 내 안의 삶에서 끄집어낸 경험의 울타리로. 그건 나뿐만 아니라 타인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래서 고유한 생각 더미 위, 살아내는 독창성의 글의 씨앗들. 그 씨앗들을 서로 알뜰히 보호해야 또 보호받을 수 있는 영역이 될 것이기에. 어찌 보면 모든 글쓴이들에 대한 기본적 예의이고 약속이다. 그러니 남의 창작을 도용(盜用)한다는 짧은 생각마저 죄스럽고 부끄럽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저작권의 본질을 깨트리면 자신의 글의 가치도 낭떠러지임을 숙지하고. 그제야 타인의 창작을 과소평가하는 한기(寒氣)를 떨쳐내며. 누군가의 권리를 뺏고 훔치는 헛된 도용(盜用)의 싹마저 자르고, 내게 경고의 채찍질을 매섭게 했다. 그래서 앞으로도 글을 쓸 때 비겁하고 옹졸한 겁쟁이가 되지 않기를 다짐하며. 둘도 없는 내 벗과 같은 글에 대한 사랑. 그 사랑은 타인의 글에 대한 존중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명심하고 또 명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