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부른 걱정이라는 사치에 대하여
친구의 생일 선물을 준비해야 하는 날이었다. 단톡방에서 결정된 선물 금액은 각자 8만 원씩. 하지만 당시 내 수중에는 그 현금 8만 원조차 없었다. 이러한 사실을 친구들에게 납득시키기에는 설명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당시 구직 중이었던 터라 일상에 틈이 생기면 그 자리를 불안과 우울이 파고들곤 했다.
하지만 나는 그 감정을 중단하기 위해 노력했다. 보이는 결과가 없는 지금이 안타깝긴 하지만, 이것이 평생의 상태가 아님은 자명한 사실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8만 원은 어떻게든 될 것이라고 믿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집 앞을 걷다 한 유튜브 영상에 눈길이 갔다. ‘중국인으로 태어난다면 삶의 난이도가 높아진다’는 제목의 영상이었다. 인구가 너무 많아 인력이 언제든 대체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사회, 대도시에 살지 않는 이상 조금만 나이가 들어도 구직이 불가능에 가까운 현실. 그 영상은 내가 방금까지 하던 걱정과 불안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졌다.
내가 지금 아무리 궁핍하다 한들, 이것이 객관적인 수준에서 불평할 만한 것인가?
나는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챗지피티에게 물었다. ‘선진국에서 태어날 확률’과 ‘우리나라 소득 하위 1%가 전 세계에서 차지하는 수준’에 대하여. 대략적인 수치라도 알고 싶었다. AI는 선진국에서 태어날 확률은 약 10분의 1이며, 한국의 소득 하위 1%는 전 세계적으로 상위 15~20% 정도에 해당한다는 추정치를 내놓았다.
누군가는 빚이 있는데 어떻게 상위권이냐며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인프라가 전무한 곳에서의 빈곤과 모든 시스템이 갖춰진 나라에서의 빈곤은 천지 차이다. 오늘의 끼니만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과, 오늘의 생존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의 빈곤은 그 무게가 다르다.
이와 같은 결론에 이르자 내가 누워 있는 침대, 내가 쓰는 화장품, 아무렇지 않게 누리는 모든 인프라의 품질에 감사하게 되었다. 비록 잠시뿐인 위안일지라도, 혹은 일상으로 돌아가 다시 남과 비교하며 괴로워할지라도, 가끔은 이 생각으로 돌아와 평안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혼자 이런 상념에 잠겨 있을 때 큰언니로부터 카톡이 왔다. 언니는 갑자기 ‘달란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우리가 받은 달란트는 무엇일까 물었다. 달란트를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수억 원에 달한다는데, 나는 1 달란트도 받지 못했고 하루치 임금인 ‘데나리온’ 정도나 받았을 거라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러다 언니에게 앞서했던 생각들을 전했다. 우리가 매일 남과 비교하며 괴로워하지만, 사실 이 땅에서 태어난 것 자체가 거대한 달란트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종교인은 아니지만 영문 주기도문의 한 구절을 참 좋아한다.
“Give us this day our daily bread.”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 몇십 년 뒤의 미래를 욕심내기보다 오늘 받은 빵에 감사하고, 오늘의 무탈함에 감사하는 그 마음이 좋다. 내가 오늘 아무리 끼니를 걱정한들, 그것은 상위 2등급 이내의 선진국 국민이 누리는 배부른 걱정일 뿐이다. 누군가의 불행을 보며 위안을 얻자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걱정의 대다수가 누군가에게는 사치스럽거나 사소한 일일 수 있다는 ‘상대성’을 기억하고 싶었다.
나의 우울했던 과거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이다. 논리적인 언어의 얼굴로 내 괴로움을 정당화하고 강화했기에, 나는 이제 감정을 온전히 느끼기보다 이 감정이 과연 합당한 지 끊임없이 경계하고 있다.
내일을 살기 위한 에너지를 남겨놓기 위해서는 회복의 과정이 필요하다. 일상의 사소한 것들에서도 행복을 충분히 느끼고 싶다. ‘선의’의 얼굴로 찾아오는 자기 연민을 경계하고, ‘논리’의 얼굴로 다가오는 암울한 미래에 대한 추측을 경계할 것이다. 부풀려진 감정을 현실적인 수준으로 돌려놓는 작업. 그것이 내가 받은 달란트를 낭비하지 않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