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생이 지워버린 우리의 개별성과 삶의 여백에 관하여
나는 한때 자기 관리와 시간관리에 지독할 정도로 몰두했던 사람이었다. 욕심이 많아 영어와 일본어 공부, 독서, 부업, 운동까지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해내려 애썼다. 시간을 초 단위로 쪼개고 멀티태스킹에 집착하며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그 무엇도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소정의 결과는 얻었을지 모르나, 내가 부린 욕심만큼 거둔 것은 없었다.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에는 시간관리, 갓생, 자기 계발을 키워드로 한 콘텐츠가 넘쳐난다. '우리는 언제나 부족하다'는 인식을 자극하기에 그런 콘텐츠는 늘 매혹적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영상 속 제작자들은 너무나도 쉽게 시간을 내고 자기 계발을 해내는 것처럼 보인다.
정작 현실의 나는 자기 계발을 위한 시간을 만드는 것조차 어렵다. 간신히 시간을 내더라도 막상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이 쉽지 않아, 어느새 죄책감마저 고개를 든다. 특히나 요즘 같은 AI 시대에는 변화의 속도가 체감조차 되지 않기 때문에 무언가 하지 않으면 금방 도태될 것 같다는 불안함과 조급함이 밀려온다.
많은 사람들은 업무 현장에서 주어진 일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압박에 부업에 눈을 돌리고 커리어를 쌓으려 발버둥 친다. 이런 인식은 어쩌면 당연한 흐름일지도 모른다. 나조차도 그 불안함에 밀려 오랜 작가의 꿈을 조급하게 이루어 보려 브런치 작가 심사를 넣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내가 경계하고자 하는 것은 '필요 이상의 자기 계발'과 무리하게 지속하는 '능력 밖의 자기 계발'이다.
몇 년 전 유행했던 유튜브 영상들은 퇴근 후 하루 2시간 투자로 월 1,000만 원을 벌 수 있다고 유혹했다. 그러나 현재 그런 영상들은 ‘성공 포르노’라고 불리며 멸시당하기까지 한다. 실용적이기보다 그저 자극적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세우는 ‘하루 2시간’은 사실 현실에서 내기 쉬운 시간이 아니다.
2시간으로 월천을 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닐지라도, 그 시간을 매일 만들어낸다는 것은 환경과 체력, 의지가 모두 완벽히 갖춰져야 가능한 고난도의 과업이다. 보통의 직장인이 칼퇴근을 한다고 해도 집에 오면 7시, 일터에서 이미 에너지를 소모한 상태로 저녁을 먹고 집안일을 마치면 8시가 훌쩍 넘는다. 하루 이틀은 가능할지 몰라도, 이를 몇 년간 지속하며 성과를 축적하는 것은 기하급수적으로 난이도가 상승하는 일이다.
스마트스토어가 유행했을 때, 어느 유튜버는 상품을 매일 하나씩 올리기만 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했다. 심지어 우리는 '단군 이래 가장 돈 벌기 쉬운 세상'에 살고 있다며 용기를 북돋았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 노동 뒤에 숨겨진 복잡한 성공 방정식은 의도적으로 가리고, 실패 후 찾아오는 무력감은 오롯이 우리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이렇게 쉬운데 왜 안 해?”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모든 자기 계발 콘텐츠는 인간의 개별성을 철저히 무시한다. 대다수의 사람은 직업인 이외에도 엄마, 가장, 혹은 누군가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짊어진 채 살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맥락은 삭제된 채, 하루 2시간조차 내지 못하는 '의지 박약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지속가능성에 대한 인간 심리를 교묘하게 조작한다. 인간은 흥미 없는 일을 결코 오래 지속할 수 없으며, 억지로 할수록 효율마저 떨어진다. 그럼에도 성공 포르노는 행동의 기준을 외부로부터 가져오게 만든다. 부업은 필수라거나, 영어를 못하면 루저가 된다는 식의 공포 마케팅으로 말이다.
미라클 모닝은 또 어떤가. 새벽 5시에 일어나 공부와 운동을 하는 모습은 듣기만 해도 멋지다. 하지만 이를 위해선 수면을 줄이거나 취침 시간을 앞당겨야만 한다. 사람마다 타고난 바이오리듬이 다르다. 내가 내 몸을 관찰한 결과, 나는 7시 이후에 일어나야 버틸 수 있었고 6시 기상은 하루 전체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아침형 인간에게는 성취감의 원천이 될 수 있겠지만, 모두가 그럴 수는 없음에도 사회는 이를 무분별하게 부추긴다.
작년에 황농문 교수의 ‘몰입’을 읽었다. 저자는 연구를 위해 식단과 운동까지 조절하는 대단한 사람이었고, 그런 삶이 옳다고 굳게 믿는 듯했다. 처음엔 멋지다고 생각했지만, 과연 내 삶에도 적용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나는 연구에만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일하는 것만으로도 체력 소모가 극심했고 처리해야 할 잡무도 많았다. 무엇보다 나는 한 분야 외에도 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은 사람이었기에, 그런 방식이 나의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우리는 무언가를 이루거나 소유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계발의 압박을 견디며 산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얻고자 하는 것은 소유 그 자체가 아니라, 거기서 얻어지는 부산물이다. 내 삶을 내 의지대로 영위하고 있다는 ‘통제감’과 오늘도 발전했다는 ‘성취감’ 말이다.
행복의 필수 요소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통제감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계발은 삶의 질을 높여줄 수 있다. 하지만 부산물이 아닌 소유 그 자체만을 쫓다 보면, 모든 것을 얻었을지라도 종국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뼈아픈 회한을 느끼게 될 것이다.
진정한 통제권은 선택에 대한 자율적 행사에서 나온다. 선택은 자신과의 대화이자 자기 이해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내면의 '쾌'와 '불쾌'를 나침반 삼아 삶의 방향을 결정해야 한다. 만약 그 기준이 '남들이 다 하니까', '도태될까 봐' 같은 외부의 반응뿐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내 삶이 아니며 오히려 통제권을 잃어가는 과정일 뿐이다.
우리의 삶에 여백을 허용하자. 여백이 없는 삶은 끌려다니는 삶과 다름없다. 보통의 존재인 우리는 생명 유지만 해도 이미 품이 너무나 많이 들어간다. 시간 관리에만 매몰되다 보면, 과거의 내가 과연 나의 선택에 의한 결과물이었는지 회한이 밀려올지도 모른다. 죽음을 앞둔 노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후회 역시 "열심히 살았지만 나를 위해 산 적이 없다"는 것이다.
자기 계발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체력과 시간이라는 인생의 귀한 리소스가 과연 나의 자발적 선택에 의해 합당하게 사용되고 있는지, 하루의 여백을 두고 충분히 고민해 보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