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은 메니에르 증후군을 앓고 있다

신앙이 떠난 자리에서 느끼는 환지통

by 메리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하나님을 당연한 듯 인류의 아버지로 모시며 살았다. 그러다 그 아버지가 문득 나를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상실감을 느꼈을 때, 성경의 ‘선’과 내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선’의 괴리에 위화감을 느꼈을 때, 나는 당신을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 십계명과 성경 내 서사 사이의 일관성 없는 모순들을 나는 받아들이기 너무나 어려웠다.


‘다 뜻이 있겠거니’, ‘모두 하나님의 계획이려니’라고 수긍하기에 나의 신앙은 너무나 빈약했나 보다. 수천 년간 철학자들이 고민해 온 인생이라는 거대한 주제가 고작 성경 한 권에 담겨 있는데, 그것이 모순 없는 완벽한 책이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불완전한 틈새를 개인의 자의적 해석으로 채워야 하는 의뭉스러움을 나는 여전히 지우지 못하고 있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당연한 듯 믿었다. 그러나 신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깨져버린 순간이 있었다. 남들은 인생이 힘들 때 신에게 의지한다는데, 나는 인생이 힘들 때 신앙이 부서졌다. 나는 매일 기도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내 고통을 알고 있다면, 아버지라는 존재가 자식의 고통에 숨죽여 우는 ‘선’ 그 자체라면, 제발 이 상황을 멈춰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비극은 매일 반복되었고, 나는 망가져 갔다. 결국 나는 결론을 내렸다. ‘신은 바쁘구나. 온 세계 각지에서 들려오는 기도의 소음에 메니에르 증후군이 온 것이구나.’ 나의 하나님은 아픈 것이다. 그러니 기도해도 소용없다. 20대 초반, 나의 원망은 극에 달해 기독교인들과 싸우고 다녔다. ‘회개하라’고 외치는 엄마에게는, 잘못했으면 신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나 사과하고 용서받으라며 고함을 쳤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잘려 나간 팔에서 고통이 느껴지는 ‘환지통’ 같은 현상은 여전히 내게 일어난다. 나에게 신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삶이 고될 때면 습관처럼 신을 부른다. 욕하고, 원망하고, 다시 기도한다. 누군가를 잃었을 때 그 영혼의 보금자리가 있기를 바랄 때나, 삶이 너무 지쳐 비명이 나올 때 나는 다시 신을 부른다. 하나님만 부르지도 않는다. ‘한 놈만 걸려라’라는 심정으로 온갖 신을 다 불러내 나의 행운과 복을 구걸해 본다.


사실 이런 기복신앙이 혐오스러웠던 적도 있다. ‘아들 좋은 대학 가게 해주세요’ 라거나 ‘로또 당첨되게 해 주세요’ 같은 세속적인 기도 제목들이 싫었다. 천국조차 이 삶에서 이루지 못한 부귀영화를 위한 보상 체계처럼 느껴졌다. 배우자 기도는 또 어떠한가.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싹트는 미움, 혹은 그 기도로 만난 배우자와 이혼하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 탓인가?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과연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했던 사람일까? 응답은 반드시 내가 원하는 방향이어야만 하는가? 만약 하나님이 지혜의 근본이라면, 죽음이 징벌이 아니라면, 이 세상 이후의 삶이 진정 찬란하다면 우리의 기도는 애초에 번지수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가 생각하기에 더 나은 방향의 응답을 이미 주었을 것이나, 그저 내게 그것을 바라볼 혜안이 없었을 뿐이다. 내가 멈춰달라고 울부짖었던 그 고통이 사실은 내게 필요한 훈련이었다면, 나의 교만을 부수기 위해 꼭 필요했던 체벌이었다면 말이다.


비록 나는 이제 죽음 이후의 천국을 꿈꾸기보다 먼지가 되어 소멸하기를 바란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이들은 대부분 비종교인이고, 그들이 지옥에 있다면 나의 천국 또한 평온할 리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다시 한번 자문해 본다.


나는 기도의 응답을 구분할 혜안이 있는가. 그가 내려준 동아줄을 알아볼 수 있는 충분한 시력을 가졌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