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모된 나의 존엄을 되찾기 위하여
‘Dignity’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우리말 뜻이 공존한다. 하나는 ‘품위’이며 하나는 ‘존엄’이다. 나로서는 이 두 가지 뜻이 한 가지 단어에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나의 많은 페르소나 중 일부를 차지하는 것은 ’ 아르바이트‘이다. 애초에 조직 생활과도 맞지 않거니와, 유연한 삶을 살기 위해 선택한 것이 어쩐지 요즘 나의 많은 존엄을 갉아먹고 있다. 신분이 공식적으로 철폐된 사회지만, 비공식적으로 사장이라는 작은 감투를 쓰면 뭐라도 된 양 착각하는 사람들을 매일 마주하고 있다. 그들의 품위(dignity)는 나의 존엄(dignity)을 지출하여 조형되어진다.
이는 비단 아르바이트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많은 노동자는 밥벌이의 비애를 가지고 있다. 밥을 빌어먹고 산다는 것, 꼬박꼬박 밥을 씹어 식도로 넘기는 그 활동을 위해 지출해야 하는 나의 영혼의 양식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두 끼를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밥이다. 이것이 진저리나는 밥이라는 것이다."
<김훈, 라면을 끓이며> 중에서
세계 인권 선언에서 파생된 현대적 의미의 존엄은 현실에서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인간은 목적이며, 수단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상주의적 철학에 부조리를 느낀다. 특히 자영업자의 지시 하에 일하면서 느끼는 것은 나도, 그들도 ‘돈을 주는 것’에 너무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유연하고자 선택했던 선택지에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의탁하고, 그것 위주로 무언가를 계획하고 설계했다. 그래서 부당함이 축적되어도 그들의 부당함에 고개를 끄덕이며 ’ 그렇죠 ‘라고 말하는 편을 선택했다. 부당함에 맞선다면 그 환경이 나의 작은 페르소나를 숨 막히게 할 테니 말이다.
요즘 식욕이 없다. 밥벌이라는 행위로 인해 정작 밥을 넘기지 못해 4kg이 빠졌다. ‘아프니까 사장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인정한다. 그들도 아플 것이다. 성숙하고 인격이 훌륭한 사장님도 분명 있을 테지만, 운이 나쁜 나는 만나보지 못했다. 그저 사업자를 가진 인간으로서 자신이 필요해 누군가를 구인하며 돈을 버는 사람들은 나와 별반 다를 바가 없는 사람들이다. 나도 사업자등록증이 있고, 여기서 누구를 고용하면 나도 그들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묘하게 우월의식이 스며있는 그들의 말투와 지시에 나는 식욕을 잃었다. 그래서 나는 두렵다. 나의 사업 규모가 커져 누군가가 필요한 상황이 될 때, 나는 어떤 태도로 사람을 대할 것인가. 나도 누군가의 존엄을 희생해 가며 나의 지갑을 채울까?
그래서 나는 내일 움켜쥐었던 모래를 손에서 놓기로 했다. 그들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는 언제까지나 우리들의 관계가 고용주와 고용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내일 그 관계를 깨려 한다. 단단한 것들은 부서지기 쉽지 않은가. 단단했던 나의 계획을 부수어야지. 그리고 어디든 스며들 수 있는 존재가 되어 세상을 유랑해야지.
가끔 직장 내 괴롭힘이나 직장에서 일어난 부조리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이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본다. 그들의 생활, 책임감, 커리어를 위해 쌓아 올렸던 자신들의 노력이 족쇄가 되어 환경을 떠나지 못하고 결국 삶의 의지를 상실하는 사연 말이다. 그들이 상실해 버린 존엄과 영혼의 상처를 나는 공감하지만, 나는 소유를 포기하고 떠난다.
요즘 내가 통과하는 하루하루는 어쩐지 움켜쥐었던 것을 놓아가는 과정인 것 같다. 안녕, 나의 밥벌이였던 것. 그리고 앞으로 나의 밥벌이가 될 것을 맞이해 또 안녕.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각자 핸드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
<김훈, 라면을 끓이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