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에 대한 고찰
짝사랑은 타인과의 계약이 아닌, 오로지 자신과의 약속이다.
그래서 이 사랑은 늘 우리를 더 괴롭게 만든다.
사랑은 가끔 우스워 보인다. ‘사랑’은 낭만의 대명사이지만, 길거리 연인의 노골적인 스킨십은 못마땅하고, 자신의 진심을 모조리 게워낸 사랑은 한심하다 못해 지질해 보이기까지 한다. 사랑은 글의 가장 좋은 소재가 되기도 하지만, 그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날것의 감정을 공개하는 일은 당사자에게도, 상대에게도 이득이 없다. 상호성 없는 짝사랑은 존중받기 어렵다는 진실이나 그로부터 기인한 자격지심이 공개적 작문을 주저하게 만든다. 어떠한 사랑이 결실을 보아 '과거'가 되거나, 실패 후 회한 섞인 '추억'이 되었을 때쯤에야 시간의 거리감이 애끓는 감정을 적당히 희석해 줄 것이며, 그때서야 비로소 그 감정은 비웃음 당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 강렬한 감정은 언젠가 사라질 거품임이 자명하니 감정에 도취된 그 문장들은 사리분별이 불가한 원초적 기록들로 여겨질 뿐이기 때문이다.
어딘가에서 보았다. 짝사랑이란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내가 아는 단편적인 모습과 나의 허구적 상상이 빚어낸 간절한 감정일 뿐이라는 폄훼를 말이다. 짝사랑의 애달픔 또한 대상이 아닌 '가능성'에 대한 미련과 닿을 듯 닿지 않는 거리가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논리. 그럴듯하지 않은가? 응답다운 응답을 받지 못한 채 사랑을 앓는 사람이라면, 현실을 직시하라는 그 차가운 문장에 고개를 끄덕이며 역설적인 위로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묻고 싶다.
상상력은 오직 짝사랑에만 존재하는가? 상상력은 모든 관계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 우리는 타인의 지극히 일부분만을 전부라 믿으며 관계를 맺고, 그 믿음이 배신당하면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 같다"며 배신감에 몸을 떤다. 10년을 함께 산 부부조차 외도라는 사건 앞에서는 서로에게 가장 낯선 타인이 되어버린다. 인간은 누구나 여러 페르소나를 갖고 있고, 우리가 사랑하는 건 언제나 그 사람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그저 우리는 타인의 수만 가지 조각 중 몇몇 조각에 과도하게 높은 점수를 주고 있을 뿐이다.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는 또 어떠한가. 만약 내가 실체 없는 가능성 그 자체에 목을 매는 존재라면, 이 세상 모든 이들과의 가능성을 계산하느라 일상을 살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가능성의 방향계는 단 한 사람만을 가리킨다. 대상이 우선이고, 가능성은 그 뒤를 따라오는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그러니 대상의 일부에 눈먼 사랑이라고 폄하하지 말자. 사랑을 하는 모든 이는 어느 정도 장님이고, 어쩌면 기꺼이 장님이 되어야만 비로소 사랑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짝사랑은 외롭다. 하지만 냉정히 말해 모든 관계는 각기 다른 모양의 외로움을 품고 있게 마련이다. 감정의 무게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리는 '등가(等價)의 사랑'이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할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공식적인 관계가 된 연인들조차, 그 사랑이 언제나 평형을 이루지는 않는다.
연인들은 끊임없이 상대를 확인하고, 확인받으려 애쓴다. 그 과정에서 상처 입고, 고통 속에서 상대의 부족한 사랑의 양을 억지로 수용하거나, 끝내 이별을 맞이한다. 때로는 '권태'라는 허들이 예고 없이 나타나 평탄하던 순행을 방해하기도 한다. 짝사랑도 그 본질은 다르지 않다. 나의 뜨거움과 비례하지 않는 그의 무심한 온도가 나를 외롭게 할지라도, 그것은 오직 짝사랑만이 짊어지는 비극은 아니다.
그러나 짝사랑의 진짜 괴로움은 '솔직함'을 가로막는 그 투명한 벽에 있다. 약속된 관계 안에 있다면 우리는 물을 수 있고, 또 물을 자격이 있다. "나를 왜 외롭게 하는가", "우리의 사랑은 왜 등가가 아닌가"라고. 그 물음에는 어떤 식으로든 응답이 돌아온다. 하지만 짝사랑에서 이 질문은 그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가슴속에서만 울릴 뿐이다. 답을 구하려 드는 순간, 상대는 멀어진다. 선을 넘어야 관계가 진전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강요와 재촉은 상대를 뒷걸음질 치게 하기에 우리는 '솔직함'이라는 카드를 내밀 타이밍을 전략적으로 계산해야만 한다. 역설적이게도 그 전략을 짜는 동안 우리의 숨은 가쁘게 막혀온다.
상대와 나의 정보는 철저히 비대칭적이다. 나의 솔직함이 기가 막힌 성공의 전략이 될지, 혹은 돌이킬 수 없는 리스크가 될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나의 절절한 고백이 그에게 감동의 서사가 될 수도, 혹은 부담의 무게가 될 수도 있다는 그 지독한 불확실성. 그 가능성의 양극단 사이에서 모든 감정은 호흡 곤란을 겪는다.
SNS로 연결된 관계라면, 그곳은 더 이상 자유로운 공간이 아니게 된다. 철저히 폐쇄적이었던 그 세계는 상대의 팔로우라는 노크 이후 부름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은 응당 응답하는 것이기에. 단 한 번의 변명도 허용하지 않은 채 상대가 영영 떠나버릴까 봐, 즉각 부름에 응하는 충성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때부터 사적 공간은 오로지 그 상대만을 의식하는 검열의 장소가 된다. 스스로를 검열하고, 상대의 확인 여부를 추적한다. 기록을 위한 공간이 마음을 확인하는 도박장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만약 올린 스토리가 두 개인데 그중 하나만 확인했다면, 그것은 의도치 않은 누름이었을까 초조해할 것이고, 올린 지 11시간이 지나도록 확인하지 않았다면, 다음 날 기록이 사라지기 전에 상대가 봐주기만을 조급하게 기다리며 홀로 애태우는 사투인 것이다.
결국 짝사랑은 타인과의 계약이 아닌, 오로지 나와의 약속이다. 나의 생(生)의 지도 속에 상대의 존재를 기어이 끌어들이라는 스스로를 향한 명령이며, 그 명령을 묵묵히 이행하는 집행자 또한 나 자신일 뿐이다. 짝사랑은 타인과의 소통이 아니라, 내 안의 나와 벌이는 팽팽한 줄다리기다.
그러나 영원히 팽팽할 것만 같던 그 줄도 언젠가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기 마련이다. 응답 없는 기다림 속에서, 부름 없는 문 앞을 평생 망부석처럼 지키겠노라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연인들의 외로움이 두 사람 사이의 서사라면, 짝사랑은 오직 나의 '의지'와 나의 '약속'이 충돌하는 단독자의 서사일 뿐이다.
사랑의 감정은 너무나 가변적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장기전을 결심했다 하더라도, 그 강렬한 감정은 등락을 반복한다. 언제 까지든 당신의 곁을 지키며 편안한 사랑을 주겠노라 스스로와 약속했을지라도, 상대의 아주 사소한 기척에도 온몸을 움찔거리며 초조하게 눈동자를 굴려대는 스스로가 문득 애처로워지는 것이다. 짝사랑을 하는 이들은 아마도 오랫동안 이 굴레를 반복할 것이다. 유지와 포기, 그 끝없는 평행선 사이에서 서글픈 저울질을 멈추지 못한 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