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설가 지망생이 아니다.
김연수 작가의 소설이 아닌 산문을 좋아해서
소설가 지망생에게나 필요할 것 같은 이 책을 샀다.
벌써 두 번째 재반복이다.
같은 책을 여러번 읽는 것이 익숙한 사람에게는 두 번째 읽는 것이 큰 의미는 아니겠으나,
(오히려, 너도 드디어 그 지경이 되었구나? 하고 반가워하려나)
같은 책을 여러번 읽는 사람을 외계인이라고 생각하는 지금의 나에게 이 일은 크나큰 일이다.
(당신의 책이 고집스러운 바다청년이라는 사람의 내면 어딘가를 바꾸고 있다는 뜻이니깐)
소설가가 아닌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우선 글을 쓰는 사람인지 물어봐야한다.
무슨 글이든 글을 써야 한다면 이 책은 유용하다.
세상 모든 글쓰기에 공통점에 대해 작가는 한결같이 하나로 말한다. “쓴다. 생각한다. 다시 쓴다.”
글을 쓰지 않지만, 논문을 쓰는 나는
논문 쓰는 ’일‘에 재능보다는 재미가 있는 나는 그 끔찍한 일에서 인정하는 것은
“논문이라는 것이 ’쓴다, 생각한다.다시 쓴다의 반복이며 그래서 고통스러우며
‘너가 안 쓰고, 안 생각하고, 다시 안 쓰면 아무도 써주지 않는다’를 인정하며
오늘도 한 문장이라도 쓰고 퇴근 해야 결국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는 또 예상밖의 위로가 있다.
나는 박사학위 졸업으로 교육 과정을 끝냈다. 나를 가르칠 선생이 없어진 상태다.
대학생은 선생이든 스승이든 고프면 대학원을 가면 되지만,
나는 누군가의 선생이고 스승이 되야 하는 위치에 있다(표면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하지만, 나는 논문 쓸 때마다(논문도 글이니깐) 선생이 옆에 있으면 좋겠다.
나의 논문은
선생이 형편없다고 지적하면 "지는 얼마나 잘 쓴다고 ㅈㄹ이야"라는 마음으로
쓰고(일단 쓰자. '무'인 상태 싫어. '유'를 만들고 더 나은 유를 생각하자),
생각하고(아, 썼구나, 글을, 이 그지 같은, 이 걸레 같은, 이 흉직한, 때려치는게 어때?),
다씨 썼고(써주는 사람 없고, 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너뿐이야. 써야지. 안 쓰면 어쩔건데?),
아주아주아주 드물지만 잘 썼다고 칭찬하면
"그래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자나? 성장하고 있군, 더 성장해야지. 그래도 이젠 성공하고 싶다"라는 마음으로 쓰고(쓰라고 하니깐 일단 쓰자), 생각하고(나 논문 잘 쓰는 거 맞아? 빈 말이셨던 거 아닐까? 글이 왜 이래?), 다시 썼다. 그런데 이제 그런 칭찬이든 지적이든 해주는 선생은 나에게 없다.
박사학위를 소지한 이상 내 밥벌이 세계에선 알아서 쓰는 건 기본이고, 잘 쓰면 그건 내 브랜드다.
스승과 선생이 있을 수 없는 내 자리에 이 책은 멀리서 찾아온 선생이다.
과학하는 선생은 안 되지만, 소설쓰는 선생은 되니깐(타전공 선생님).
선생은 '논문은 안 써봐서 모르겠지만 글쓰는 거라면 그렇게 쓰는 거고, 그렇게 써야 끝낼 수 있다고 가르친다. 쓰고 나면 그 사람은 그 글을 쓰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글쓰기는 무효화 될 수 없다. 나도 여전히 그렇게 쓴다'며 나를 가르치고, 또 위로한다.
이 배움과 위로가 좋아서 나는 다시 이 책을 읽고 있다.
더하기:
이 글은 애플 매직키보드를 구입 후 사용감을 테스트하려고 매직키보드+아이패드 에어에서 작성했습니다.
매직 키보드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