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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베트 Dec 12. 2020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안에 숨은 기독교

김기덕 감독의 로카르노 영화제 수상작 불교 영화를 기독교로 읽다

* 스포일러 주의

(17년이 지난 후에도 스포일러라고 부를 수 있다면)


우연히 넷플릭스에서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발견했다. 김기덕 감독에 대해 아는 거라곤 15년 전 쯤 신문만 열면 보이던 그에 관한 기사나 인터뷰를 읽으며 어렴풋하게 남은 기억이 고작이었고, 영화는 단 한 편도 보지 못했다. 인터뷰에 대한 기억마저도 거의 다 퇴색되어 남은 게 별로 없었다. 덕분에 다른 한국감독 작품들에게 흔히 갖게 마련인 편견이나 선입견도 별로 없었다. 그에 대해 기억하는 거라곤 '퐁뇌프의 연인들'을 김기덕 감독이 좋아했다는 것, 그가 영화를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다는 것 정도.


그렇게 나는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며칠 동안 마치 무엇에 홀린 것처럼 시간을 보냈다. 나는 김기덕 감독이 무엇을 의도하고 영화 속 이미지를 만들었는지 모른다. 그가 상징들을 계획한 건지 아니면 마음에 떠오르는 데로 나열한 것인지 확인하지 못했다.이미 세상을 떠난 그에게 물어볼 기회도 영원히 없다. 


따라서 지금부터 쓰는 건, 그저 내 눈에 어떤 상징들이 눈에 띄었는지 서술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감독 역시 관객들이 그의 의도를 완전히 간파하리라 기대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술이라는 건 보이는 사람과 보는 사람 간의 관계에서 비롯되니까. 


1. 방주


영화에서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섬인 듯 배(舟)인 듯 완전히 비현실적인 암자의 모습이다. 물 한가운데 떠있는 이 작은 암자는 절대로 산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배설하며 생활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물로 둘러 쌓인 성지로 유명한 프랑스 노르망디의 몽생미셸의 모형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암자는 생긴 것이나 위치로 볼 때 '방주(方舟)'다. 한국어 성경에서는 네모난 배라는 의미로 방주라고 번역됐지만, 실제 히브리어(תיבת, 테밧)나 이를 번역한 라틴어(arca), 영어(ark)는 '무언가를 보호하기 위한 상자' 즉 보물상자처럼 생긴 함(函), 궤(櫃)를 의미한다. 즉 방주란 홍수로부터 선택된 생명을 보호한 궤였다.


성경에서 지성소 안에 두었던, 훗날 다윗이 되찾아오기 위해 그리 애먹던 언약궤, 즉 성궤도 똑같은 어휘로 불린다. 히브리어로 테밧, 영어로 아크다. 


기독교에서 테밧은 가장 중요한 상징 중 하나다. 노아의 테밧은 세속의 물결(홍수)에서 노아 가족의 영혼을 지켜주었다. 말씀을 넣어두던 언약궤 테밧의 경우, 그 상자 안에 들어 있는 말씀은 요한일서에서 언급됐듯 생명이다.


그런 이유로, 영화 속에 작은 암자가 나오고, 불상과 미륵이 보이며 노승과 동자승이 살고 있음에도 완전히 기독교적 이미지다. 더욱이 촬영장소는 깊은 산골, 청송교도소가 인근에 위치한 곳이다. 유배의 장소다. 물은 세속이며, 암자는 세속에 유배된 영혼이다. 


그 작은 암자 건물 안은 존재하지 않는 벽으로 나뉘어 있다. 동자승과 노승 모두 그 보이지 않는 벽을 대개의 경우 존중하고 산다. 하지만 단 한 번, 청년이 된 동자승이 육욕을 이기지 못했을 때는 그 벽이 무시된다. 그 누구도 이 벽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벽은 인간 관념 속에 존재할뿐이다. 



2. 하나 뿐인 좁은 문 혹은 이쓰쿠시마 도리이


영화 속에서 노승과 동자승이 기거하는 암자에 드나들기 위해서는 암자에서 쪽배를 타고 노를 저어 저수지 한쪽에 세워진 나무에 도달해 그곳에 배를 대고 천왕이 그려진 대문을 지나야 한다.


그 누구도 헤엄을 치거나 다른 곳에 배를 대지 않는다. 그 대문을 제외하면 사찰은 물로 완전히 둘러싸여 외부로부터 단절된 성지처럼 보인다. 그 옛날 여염집 대문과 별로 다르지 않은 크지도 않은 그 문에 천왕이 새겨지면서 물 위에 뜬 방주 같은 암자(庵子)의 성지 같은 모습이 완성된다.


여름이 되어 저수지 물이 불으면 이 대문의 아랫부분이 물에 잠긴다. 사람들은 그래도 반드시 이 대문을 지난다. 심지어 범죄용의자를 추적하러 다니는 형사들조차도 이 대문을 통해 드나든다.


마치 암자 안에 보이지 않지만 사람들 마음에 존재하는 벽처럼, 이 대문 이외에는 암자로 향하는 길이 없다. 길은 단 하나뿐이다. 기독교에서 구원을 향하는 길이 하나뿐이라고 하는 것처럼.


-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사도행전 4:12)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태복음 7:13-14)


물에 비친 그 대문의 모습은 일본의 유명한 이쓰쿠시마 도리이를 연상시킨다. 그 도리이 역시 성지로 향하는 문이다. 여름에 저수지 물이 불면 대분 바닥이 물에 잠긴다. 그마저도 간만(干滿)에 따라 바닥이 드러나거나 잠기는 이쓰쿠시마 도리이와 비슷하다.  


이 영화 촬영지인 청송군에서는 김기덕 감독의 미투 사건 이후 이 영화의 흔적을 지우느라 바빴다는 기사를 읽었다. 어느 나라나 세상 사람들은 다 그렇겠지만, 나를 포함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더욱 더 개개인의 품성과 그 사람의 다른 업적을 분리시키기 힘들어한다.  


피해자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위대한 예술가 중 변태, 이상성욕자 같은 광기는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어차피 인간 자체로 볼 때 숭배하고 우러러볼 가치 있는 사람은 역사상 단 한 명도 없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훌륭한 예술가였기 때문에 그의 범죄를 합리화하거나 사면하자는 뜻은 아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작품은 작품이라는 의미일뿐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모든 성범죄자 중 아동성애자들을 가장 혐오하는데, 그럼에도 로만 폴란스키는 어쩌면 '미친 놈'이었기에 그런 작품들을 만들 수 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대부분의 예술은 인간에 관한 것이고, 인간에 대한 신선한 시각과 성찰은 좀 미쳐야 잘 생기는 법이다.


김기덕 감독은 암자의 두 번째 승려 역할을 맡는다. 그의 연기를 보면서,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없다고 자포자기하던 탕아가 영화 속에서나마 좁은 문을 향해 살아가는 시늉이라도 하고 싶어하는 그런 서글프고 필사적인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3. 자기 짐을 지고 오르는 산


영화 속의 첫 에피소드인 첫 번째 봄에서, 탁발 나가는 스님을 따라 물을 건넌 동자승은 골짜기에서 장난 삼아 물고기와 개구리, 뱀 같은 작은 동물들에게 돌을 매단다. 공교롭게 이 세 가지 동물은 전형적인 먹이사슬을 이룬다.


나중에 이를 알게 된 노승은 동자승에게 동물들을 모두 찾아 그 돌들을 풀어주라고 명한다. 그리고 하나라도 죽었다면 평생 마음에 짐을 지고 살아야 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동자는 울면서 동물들을 찾아 짐을 풀어주려 하지만 두 마리는 이미 죽었다.


동자승이 성장해 세상으로 나갔다가 돌아와 홀로 수련하는 '겨울' 편에서, 장성한 동자승 역을 맡은 김기덕은 자기가 어린 시절 동물들에게 했듯, 맷돌을 자기 허리춤에 매어 끌며 산에 오른다. 돌을 끌고 산에 오르는 모습에서 언뜻 시지푸스의 신화가 떠오를 수 있다. 아무리 노승이 애를 쓴 들, 인간의 업보가 사라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습은 성경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인상적인 장면과 관련되어 보인다. 바로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의 모습이다. 그 시절 십자가형을 받은 죄인들은 각자 자기가 묶일 십자가를 메고 언덕을 올라야 했다.


영화 속에서 김기덕은 십자가 대신 미륵상을 들고, 맷돌을 허리에 묶어 끌며 산에 올랐다. 미륵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내려올 일종의 구원자, 그리고 맷돌은 대개의 경우 여성을 상징한다.


영화 속 맥락에서 맷돌 즉 여성은 육체적 욕망 혹은 세속적 욕망을 대표할 수 있다. 장성해 중년이 된 동자승은 자기를 잡아 끄는 세속적 욕망을 물리적인 중량으로 상징화해서 그 중량을 이기고 끝내 산 정상에 오르고 만다. 성폭행 사건의 가해자였던 김기덕 본인이 그 역을 맡은 건 그래서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그가 허리에 매고 끌던 맷돌은 성경에서 말하는 '자기 짐'으로도 보인다. 번얀의 소설 '천로역정'에서 주인공 크리스찬은 자기의 짐이 버거워, 즉 자기의 죄가 버거워 어쩔 줄 모르다 급기야 가족과 살던 곳을 버리고 천국으로 향해 길을 떠난 것도 연상시킨다. 


마침내 산 정상에 오른 승려는 미륵상을 올려놓고, 아둥바둥 살아가던 좁은 못(池)을 내려다본다.


산은 신과 대화, 혹은 기도하는 장소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릴 뻔 했고, 모세와 장로들은 시내 산에 올라 하나님과 함께 먹고 마셨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겟세마네(겟세마네는 기름 틀이라는 의미, 육신이 짓이겨져 피를 흘리는 사건을 상기시킨다) 동산에 올라 기도하셨다. 그 외에 산에 올라 기도하는 이미지는 수 없이 여러 번 성경에서 언급된다.


4. 밑바닥 없는 배


여름 편에서 동자승은 어느덧 훌쩍 성장해 사춘기를 지난 모습이다. 민가에서 한 창백한 소녀가 병을 고치려 암자를 찾아와 머물게 된다. 여자를 본 동자승은 육욕의 열병을 앓기 시작한다. 그 때부터 동자승은 자신이 지키고 살던 선을 넘기 시작한다. 


보는 사람에 따라 이 벽을 넘는 장면은 김기덕 감독 본인의 삶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인간 세상의 금기들이 덧없다고 한탄하거나 조소하는 느낌도 든다. 


어느 날 둘은 노승 몰래 못을 건너가 처음으로 육체관계를 맺는다. 그러던 어느 날 한밤중, 암자 안에서 늘 지키고 살던 보이지 않는 벽을 넘어간 소년은 소녀와 함께 쪽배 위에서 또 다시 사랑을 나누곤 그대로 잠들어 버린다. 날이 밝아 이들을 발견한 노승은 배에 물이 들게 한다. 그렇게 물에 잠겨 암자로부터 멀어지려는 배에 수탉을 던져 잡아 끈다. 성경에서 닭 우는 소리가 베드로를 제 정신으로 돌아오게 했던 것처럼, 영화 속 닭은 떠내려가 마침내 잠겨버릴 뻔한 인생 같은 배를 다시 언약궤 앞으로 당겨온다.


이들이 누워 있는 배에 물이 드는 모습은 서유기 마지막 장면에서 밑바닥 없는 배를 타야 하는 삼장법사 일행의 일화도 떠올리게 한다. 육체를 초월하지 않으면 깨달음도 없으며, 삼장법사가 구하는 대승경전도 필요 없다.


성경에서도 물은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수도 없이 나온다. 그 상징도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그 중에서 바다나 호수와 같은 큰 물은 대개 세상이나 세속을 상징한다. 모세가 홍해를 가르고 건너는 것,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는 것, 폭풍이 인 갈릴리 호수나 제자들이 호수에 그물을 던져 153마리의 물고기를 낚아 올릴 때의 물은 대개 세속, 즉 언젠가 죽어야 하는 세상을 의미한다.


특히 침례를 할 때 사람을 완전히 물에 담궜다 올리는 것은 바로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을 입는 모습이다. (에베소서 4장 24절)


노승이 배에 물이 들게 하는 장면은, 마치 소년과 소녀의 육신을 물에 잠기게 함으로써 그들이 필멸의 존재이며, 그들의 욕체적 욕망은 그 멸망(즉 사망)과 묶여있음을 보여주는 듯 했다.


청년이 된 동자승이 떠난 후 암자를 홀로 지키던 노승은 죽기 직전 스스로 배 위에서 다비식을 하며 배를 물에 가라앉힌다. 배는 결국 세상이라는 물 위에 아슬아슬하게 떠 다니는 인생인 것이다.


'겨울' 편에서는 세상에서 감옥살이와 온갖 고난을 겪었을 동자승이 중년이 되어 암자로 돌아온다. 이 때 연못의 물은 완전히 얼어붙어 더 이상 배가 필요하지 않다. 동자승은 방주, 혹은 언약궤처럼 생긴 암자로 성큼성큼 걸어 돌아간다. 더 이상 세상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어도 될 것이다.



5. 얼굴을 가리다


생물학적으로나 심리학적으로나 얼굴은 인간에게 매우 중요하다. 얼굴에 분포한 기관을 통해 청각, 시각, 후각, 미각과 같은 감각적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물론, 그 낯빛과 표정만으로도 한 사람에 대한 막대한 비언어적 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래서 얼굴을 가린다는 것은 굉장히 큰 상징이 될 수 있다. 서구문화에서 가장 유명한 '얼굴을 가린 베일' 중 하나는 바로 이시스 여신의 베일이다. 이집트 신화에 의하면 이시스 여신이 죽고 그 무덤 위 여신의 석상을 검은 베일로 가렸다고 한다. 그 베일을 들춰보는 건 금지됐다. 그 베일 뒤에 세상에 대한 놀라운 비밀이 감춰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여신의 들춰서는 안 되는 베일은 후에 서구의 낭만주의 조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성의 시대를 겪은 사람들은 과학과 이성에 크게 실망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현대문명'이 세상을 개선시키지 못한 데 실망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시스의 베일을 걷고 싶지 않았다. 진실, 혹은 이성은 두렵고 공포스러워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성경에도 얼굴을 가리는 이야기가 나온다. 출애굽기 34장에서 모세가 산에서 십계명 석판을 들고 내려왔을 때, 모세의 얼굴에서는 광채가 난다. 하나님과 말씀을 나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광채를 두려워했다. 모세는 수건으로 얼굴을 덮어 광채를 가렸다. 결국 모세는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눌 때만 얼굴에서 수건을 걷을 수 있었다.


이 이야기는 고린도후서 3장에서 다시 언급된다. 바울은 새 언약을 받은 사람들은 얼굴에 수건을 벗고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다고 한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은 말씀이고, 말씀은 진리다. 얼굴에 수건을 쓰는 것은 결국 하나님, 혹은 진리를 가리는 것이다. 이시스 여신 상에 베일을 덮는 행위와 상통한다.


이런 이미지는 프랑스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여러 작품에도 나온다. 르네 마그리트는 익사한 어머니가 입고 있던 옷가지로 얼굴이 가려진 채 건져진 모습을 평생 잊지 못했다고 한다. 얼굴을 가린 천을 들추는 순간 어린 마그리트는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진실에 마주쳐야 했을 것이다.


영화 속에는 얼굴을 가린 여자가 나온다. 세상에서 온갖 고난을 겪고 '물 위를 걸어' 세상과 격리된 암자로 돌아온 김기덕 분 승려에게, 한 여자가 우는 아이를 안고 나타난다. 여자는 마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중심된 이야기'의 초상들처럼 얼굴을 가리고 있다.


밤이 깊어 여인이 잠들자 승려는 여인의 얼굴에 덮인 수건을 벗겨보려 한다. 하지만 잠든 줄 알았던 여인은 승려의 손을 잡아 멈춘다. 그리고 아기를 두고 도망치다가, 승려가 몸을 씻으려 얼음에 낸 구멍에 빠져 익사한다.


날이 밝아 여인 시신을 발견한 승려는 마침내 여인의 얼굴을 가린 수건을 벗긴다. 순간 여인의 몸은 간 데 없고 그 자리에 미륵보살상이 놓였다. 미륵보살은 현세에는 보살이지만 다음 생에 부처로 환생해 세상을 구원한다고 알려졌다.


여인은 바로 승려가 인간의 몸을 씻기 위해 만들어놓은 구멍에 빠져 죽었다. 몸이 있는 이상 몸은 더러워지고 따라서 씻어야 한다. 불교의 구원자인 미륵보살이, 공교롭게 다른 인간이 더러움을 씻던 그 장소에 빠져 죽은 것이다. 예수가 인간들의 죄를 씻어주기 위해 대신 죽은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승려가 미륵보살상을 든 채 허리에 맷돌을 메고 산을 오르는 것은 마치 보살의 죽음을 통해 자기 업보 - 죄 - 를 씻기 위한 의식처럼 보인다. 예수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렸지만, 사람들이 각자 예수를 영접하지 않으면 그 죄사함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태복음 16:24)


에필로그


마지막  ‘얼굴을 가리다’ 부분을 개인 페이스북 계정에 올리고 바로 몇 시간 후, 김기덕 감독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성경에서 얼굴을 가리는 것은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다. 그렇기에 죽음을 상징한다.


얼굴을 가리면 소통이 단절된다. 소통 단절의 궁극은 죽음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어머니가 그렇게 죽었고, 심청이 그렇게 죽었다. 물론 심청이 두려움 때문에 치마로 얼굴을 가리고 죽었다는 것은 어쩌면 뱃사람들에게 겁탈당했다는 은유일 수도, 용왕에게 처녀성을 바친다는 상징일 수도 있다.


한국에서는 죽은 사람을 입관할 때 그 얼굴을 가린다. 죽은 사람은 보지도 않고 따라서 보이지도 않는다. 산 사람들의 시선은 상호적이다.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개의치 않는다면 그것은 상대방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의미다. 성폭력은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고려하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영화 속에서 세상에서 온갖 죄를 짓고 돌아온 청년 승려가 번민을 이기지 못해 눈, 코, 입에 ‘閉’ 자를 도모지(塗貌紙)로 가리고 죽으려 하는 장면도 바로 얼굴을 가리는 것, 시선을 막고 숨을 막는 것이 죽음이라는 생각을 담아낸다.


의학적으로 볼 때 폐렴에 걸려 사망하는 것은 익사와 같다고 한다. 폐가 물에 잠겨 더 이상 숨을 쉬지 못한다. 코비드는 폐렴이다. 코비드로 세상을 떠난 김기덕 감독은 자기 몸에서 나오는 물에 익사했다고 봐도 좋다. 물은 누구나 죽음을 앞에 두고 살아가는 세상을 의미한다.


이 영화에 있는 수많은 불교적 메시지나 상징은 분명 내가 많이 놓치고 제대로 보지 못했을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도 내 나름대로 기독교라는 스펙트럼을 통해 본 것만큼이라도 정리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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