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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베트 Dec 12. 2020

개인과 역사의 고전적 은유

파인즈-아이보리 감독 화이트 카운티스(The White Countess)

일본인들 정서에 딱 맞게 로컬라이징된 포스터. 제목도 '상하이의 백작부인'.

난 영화 볼 줄 모른다. 소위 말하는, 영화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중요한 영화들 중에도 못 본 게 무척 많다. 따라서 뭐가 좋은 영화인지 잘 모른다. 무엇보다도, 어떤 영화가 좋은 영화인지 아닌지 무슨 기준으로 결정하는지 모르겠다. 이따금 편집이나 스크립트 같은 게 진짜 뜨아 소리 나올 정도로 별로인 영화도  많긴 하지만, 그런 건 여기서 논외로 한다. 일단 그런 건 최대한 피해다니려고 노력하니 말이다. 


하지만 어떤 영화를 보고 내가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할 수 있다. 2005년 제임스 아이보리와 랄프 파인즈가 만든 이 영화 The White Countess도 바로 남들의 평가와 무관하게 내가 좋아하는 영화다.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 1937년 일본이 중국을 침략할 당시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의 일종이다. 그러나 단순히 어느 특정 시대 특정 지역의 단면을 무작위로 잘라서 보여주는 스케치만은 아니다. 각 인물들은 스토리 속에서 제 역할을 하는 동시에 당시 주요 국가들의 모습을 '은유'한다. 눈이 멀어 디테일한 정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지만 여전히 꿈을 좇는 미국인이나, 백작가문의 품위를 지키고 싶지만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창녀와 다를 게 없이 다른 이들의 자선에 생존을 의지해야만 하는 구 러시아 왕족들처럼. 


이 영화는 2005년 개봉 당시 흥행에 참패했다고 한다. 당시 유행하던 할리우드 영화들과 비교해 오락성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다. 금세기 들어 사람들은 영화에서 더 이상 스토리텔링 자체의 매력을 찾지 않는 것 같다. 그보다는 오락성이나 단순하되 강렬한 메시지를 추구하는 것 같다. 간단히 말해 현대인들은 세로토닌보다 아드레날린을 분비시켜주는 영화를 원한다. 세로토닌은 무리와 함께 하며 행복감을 느낄 때 분비되는 호르몬이며, 아드레날린은 긴장감과 연관됐다. 


하지만 오락성이란 건 또 무언가. 사람마다 다 각각 추구하는 오락성이 다르다. 박력 있는 스펙터클을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구는 러브스토리에서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어하고, 또 누구는 퀴즈 푸는 걸 더 즐긴다. 


나처럼 퀴즈 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주인공들의 행동이 무얼 은유할 수 있는지 혹은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지 분석하는 것도 일종의 퀴즈다. 중일전쟁 당시 세계정세의 아주 기본적인 내용만 염두에 두고 보기만 해도 각 주인공들의 운명과 선택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무엇보다도 시나리오 작가가 일본계 영국인(石黒 一雄, 카츠오 이시구로)이라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고 또 한편으로는 부럽다. 자기 '진영'이 집단 '피해자' 의식을 갖고 있을 때는 진실 여부와 무관하게 반대 진영의 입장, 혹은 '객관적' 입장에서 무언가 서술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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