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과 서재

by 김민희


결혼은 불청객처럼 내 인생에 불쑥 들어왔다. 기고만장한 서른의 잘난 척은 미숙한 운영으로 와르르 무너졌다. 통장 잔액은 점점 0으로 수렴되고 있었다. 부모에게 죄스러웠고 형제에게 ‘쪽팔렸다’. 맏딸 콤플렉스 모범답안인 나였기에 더욱더 마음의 문을 닫았다. 오식 활자처럼 못난 모습을 꾹꾹 눌러 담아 봉인하고 묻어버리고 싶은 시간이었다.


욕을 먹고 울며 겨자 먹기로 나간 맞선자리. 내 이상형의 정 반대편에 서 있는 비주얼에 오히려 아무 부담 없이, 욕을 먹지 않을 만큼만 친절하게, 밥 먹고 차 마시고 돌아왔다. 설마 다시 만나겠는가. 다시 만날 여지를 없애기 위해 상대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다. 도리어 내 처지를 깨우치며 비수를 날리는 엄마의 지청구에 저쪽에서 전화가 오면, 이라고 협의를 했다.


일상에 아무런 파문도 일으키지 않을 남자에게 무엇 하러 안부 전화를 하겠는가. 그래도 오는 전화를 마다하지 않고 예의 바르게 통화만 열심히 했다. 바쁘다니 어쩌겠는가. 굳이 매일 전화하거나 시간을 내어 만날 것까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오해란 예기치 못한 결과를 낳기도 하는 모양이다. 상대는 바쁜 자신을 이해하는 배려심 많은 사람으로 나를 부모님께 피력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만나지 못해도 타박하거나 짜증 내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허, 참. 이토록 이해심 많은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세상에. 마음에 작은 물결조차 일으키지 않았던 남자와 1년 후에 부부가 되었다. 시커멓게 타들어 가는 부모의 애간장 앞에 서른 중반의 두 남녀에게 불꽃 튀는 로맨스가 가당하기나 했겠는가.

빈털터리로 책만 싸 들고 결혼해야 하는 나의 조건은 ‘나의 책상’에서 시작해 언젠가는 ‘나의 서재’를 갖는 것이고, 이에 동의할 것. 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니 갸우뚱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이 남자의 콤플렉스를 대리만족하는 조건이었던 모양이다. 천생연분, 별거 아니더라. 명품 가방 필요 없다. 대신 한 달에 책에 쓰는 비용에 대해 군말하지 않을 것. 물론 받는 게 있으면 주는 게 있어야 하는 게 세상의 이치겠지. 퇴근 후 집에 왔을 때 아내가 있을 것. 그 정도쯤이야. 부모님이 바쁘셔서 외가에서 자란 어린 시절이 이 남자에겐 결핍이고 ‘바람구멍’이었던 모양이다. 지친 나에게 결혼은 곧 휴식이었으니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진짜 천생연분인가?


여자 형제가 없는 덕분인가, 여자와의 싸움에 이력이 없는 이 남자의 무조건 항복에 내 뾰족한 모서리가 마모되기 시작했다. 굳이 머리 싸매며 수 싸움도 필요 없었다. 제갈공명의 계책이 무슨 소용이 있나. 신혼 초, 너무 화가 나서 동네 한 바퀴 돌고 들어왔더니 ‘헉’ 이 남자 코 골며 자고 있더라. 내가 나간 줄은 아예 모른 채. 이후 작전을 바꾸었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절대 눈치로도 내 상황을 감지 못하는, 나와 아주 다른 세계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결론내렸다. 그의 딸도 외계인이다. DNA의 위대함이여. 오래전, 여자는 금성에서 남자는 화성에서 왔다고 한 책이 있었다. 다르니, 다름을 인정하고, 나도 달라져야 했다. 그래서 평화를 얻었다. 천생연분도 만들 수 있다.


부엌은 최선을 다하는 공간이다. 아이들을 위해, 남편을 위해 밥을 짓고 찌개를 끓이고 나물을 무치는 곳이다. 사랑의 마음을 담아 정성껏 음식을 만들면 맛있게 된다는 마법의 힘을 믿고 싶어지는 공간이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사흘 치 양이 되는 된장찌개를 군말 없이 먹으니, 이런 남자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15년 주부 생활이 그냥 ‘꽁’으로 흘렀겠는가. 가끔은 조미료의 힘도 슬쩍 빌리고, 전자레인지에 부탁하면 완성되는 냉동식품에도 의지한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일취월장은 아니어도 나름대로 엄마의 손맛 언저리 정도는 흉내 낼 수 있다.



그토록 오매불망 기다리는 서재는 책상으로 만족한다. 아이들에게 방도 주어야 하고, 글 쓰고 책 읽는 일이야 식탁이면 어떠하고 소파면 어떠한가. 가끔 노트북에 바람 씌어줄 겸 카페 나들이도 즐겁다. 그래도 언젠가 내 서재에서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겠지. 한낮의 더운 바람이 누그러진 저녁이다. 밥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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