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벌이 부모가 아이를 보는 건 하루 세 시간
오늘 아침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 움츠러든 몸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며 정류장을 향하는 출근길, 5살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엄마 손을 붙잡고 걸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두꺼운 겉옷과 털목도리로 꽁꽁 싸맨 작은 몸을 보다가 그만 울컥했다.
‘따뜻한 이불속에 자고 있어야 할 아기가 엄마 출근시간에 맞춰 등원 전쟁을 치렀겠네.’
요즘 들어 회사일이 많아졌다. 잠든 아이들 얼굴도 못 보고 출근한 날이 대부분이다. 평일 아침 남편은 두 아이 등·하원을 도와주고 한 시간 일찍 출근하는 나는 전날 저녁 못한 어린이집 도시락을 설거지한다. 급히 책가방을 싸다 보면 자주 준비물을 빠뜨렸다. 퇴근 후에는 100미터 달리기를 해 어린이집에 있는 두 아이를 데리고 온다. 저녁을 먹이면 금세 씻겨서 재울 시간. 눈앞에 보이는 집안일, 쓰레기나 빨래 더미도 못 치우고 잠드는 날이 계속 이어진다.
하루가 쉴 틈 없이 돌아가지만 다른 일반적인 맞벌이 부모가 보면 배부른 소리다. 내가 아는 모든 맞벌이 부모는 칼퇴근이 불가능하므로 조부모나 베이비시터의 힘을 빌린다. 자기 직장을 지키기 위해선 누군가의 희생이나 금전적인 지출이 필요하고 주말에만 아이 얼굴을 보는 부모도 적지 않다.
결혼 전 누구보다 자유로운 삶을 살던 내가 이렇게 일과 육아의 감옥에 갇히게 될지 알았을까. 인생은 뒤통수를 치는 법이라더니 두 아이를 낳은 것도 교통사고 같았다. 갖은 노력에도 아이를 못 가진 부부들에게 미안하지만 출산·육아에 대한 어떤 지식이나 준비도 없던 상태에서 지난 3년 좌충우돌 고난의 연속이었다.
육아는 단계별로 어려움이 있지만 가장 힘든 순간은 ‘지금’이다. 첫째 율이가 36개월, 둘째 솔이가 14개월인 지금은 주말이면 집안일을 피해 집 밖으로 도망가는 게 일상이 됐다.
며칠 전엔 공용 육아휴게실에서 둘째 기저귀를 갈아주는데 집이었으면 30초도 안 걸릴 일이 15분 넘게 걸렸다. 겨울이라 여러 겹의 옷을 입혔는데 하나씩 벗기거나 입힐 때마다 내 손을 벗어나 높은 곳을 오르내리던 아이가 결국은 휴게실 안내판을 망가뜨렸다. 화가 났다가 눈물이 났다.
신생아 시절 6개월은 밤잠 못 자는 고통을 견디고 24시간 내내 한 시간 주기로 수유하느라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의식 생활이 불가능했다. ‘오늘만 버티자.’는 심정으로 한 단계를 넘어서면 다른 종류의 시련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기억에 남는 사건은 힘들거나 위험했던 순간이다. 율이는 돌 무렵 싱크대 잠금장치를 열어 식칼 두 개를 양손에 들고 걸어 다닌 적이 있다. 내가 알아챘을 땐 이미 바닥에 넘어진 아이가 울음을 터뜨린 후다. 손가락이 엘리베이터 문에 끼어 정밀 촬영한 일도 두 번 있다.
어린 두 딸을 처음 보는 베이비시터 손에 맡기고 복직할 때도, 아이가 아픈데 회사에 붙잡혀 있을 때도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는데 의외의 상황에 퇴사를 고민하게 된다.
“어린이집 가기 싫어.”
율이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이다.
율이는 어린이집 등원 거부로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를 고민에 빠뜨렸다. 셔틀버스를 태우기 전 길바닥에 드러누워 한 시간을 넘게 울다가 동네 유명인사가 됐다. 아주머니, 할머니들이 나와서 출근하지 말라며 성화를 냈다. 우는 아이를 억지로 태우고 나서 목 놓아 운 게 여러 날이다.
전업주부의 삶이라고 편한가. 어린이집 학부모들과 브런치를 먹다가 다 같이 운 사건이 있다. 은진 씨는 새벽 일찍 출근해 밤늦게 퇴근하는 남편 대신 네 살, 두 살 아이를 거의 혼자서 키운다. 어느 날은 남편에게 “나 너무 힘들어.”라고 말했는데 “무슨 말 할지 아니까 그만해.”라는 대답을 들었다. 은진 씨 남편은 서울에서 수원까지 매일 왕복 세 시간을 출퇴근한다. 현관문을 열면 신발도 벗기 전 “설거지해줘.”, “쓰레기 버려줘.” 등의 요구도 들어주는 나름 노력하는 가장이다. 둘 다 지칠 대로 지쳐 누군가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상황이었던 걸까. 말하던 은진 씨가 울고 다 같이 눈물 콧물을 흘렸다.
그때그때 최선을 다했는데 돌아보면 후회 투성이다. 아이 울음소리가 견딜 수 없어 귀를 막은 채 잠들고 부부싸움을 하다가 둘 다 아이를 내버리고 집을 나간 적도 있다.
‘내게 부모 자격이 있나.’
수만 번 자책해도 지금까지 가슴 한구석에 남아 아픈 기억이다.
아무리 힘들게 하던 아이도 만 세 살이 지나면 “다 컸구나.” 느낄 만큼 공동체 생활의 기본적인 규율을 따르는 인격체가 되지만 이때부터는 정신 싸움의 시작이다. 두 아이 다 폐렴으로 입원했을 때는 의사표현이 보다 정확해진 율이가 링거를 거부했다. 나와 남편, 간호사 세 사람이 팔다리를 붙잡아 주삿바늘을 꽂으면 자기 손으로 잡아 빼고 입으로 물어뜯어 병원 바닥에 피가 뚝뚝 떨어졌다. 강제로 입을 벌려 약을 먹였더니 뱉는 것도 모자라 혀에 남은 것을 손톱으로 긁어내는 아이였다.
세 살이 지나면 유치원 적응, 초등학교 입학, 중학교 사춘기, 고등학교 수험생. 아이가 성장하는 동안 무수한 고비를 넘겨야 비로소 부모 품을 벗어날 때가 온다고 한다. 이 긴 세월 부부는 전쟁터에 선 동지의 관계, 어떤 난관이라도 같이 부딪쳐야만 한다.
매 순간 나를 지탱해준 힘은 모성애가 아니었다. 사랑을 넘어 인생의 동반자이자 팀플레이어인 남편. 나의 출산·육아 인생이 혼자가 아니라 우리가 언제나 함께였다는 든든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