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입장이 돼보니

워킹맘 홈대디 라이프

by 노향

“우리 두 사람 중 누군가 일을 그만두고 율이를 봐야 한다면 내가 맞는 것 같아. 네가 다시 찾고 싶던 직업이니까.”

율이가 생후 8개월 무렵이던 2016년 6월의 어느 저녁. 우리 부부는 퇴근길 집 앞 술집에 마주 앉아 일생일대의 결정을 내렸다. 지금 와서 보니 우리 가족의 삶을 너무나 바꿔놓은 선택이다.



남편은 갑작스러웠지만 오랜 시간 고민하고 준비한 말을 꺼냈다. 50일 된 갓난아기를 맡아 6개월 동안 키워준 베이비시터가 그만두겠다고 통보한 지 일주일 만이다. 그동안 새 베이비시터를 구하려고 정부와 소개업체, 동네 맘카페에 하루에도 수십 개의 글을 올렸는데 단 한 번의 연락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가슴이 떨렸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앞으로 펼쳐질 삶이 두려우면서도 설렜다. 남편의 복직이나 재기가 힘들지 모른다는 걱정보다 아빠 육아가 아이의 정서발달과 평등한 부부관계에도 좋은 영향을 줄 거라는 기대가 컸다.



남편은 그 후 1년, 그리고 일자리를 되찾아 다시 맞벌이로 돌아온 지금도 육아와 집안일을 거의 혼자서 떠맡았다. 아이들 등·하원과 매일매일 산더미같이 쌓이는 빨래를 묵묵히 해냈다. 우리는 서로의 역할을 해봄으로써 수없는 시행착오를 겪었고 이혼 직전까지 갈 뻔도 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잃은 것보다 얻은 게 훨씬 더 많았다.



구글 이미지



맞벌이할 때도 외벌이 할 때도 부부싸움을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늦는 귀가시간이다. 부부생활이 힘든 것은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머리로는 이해되는 행동도 막상 내 앞에 닥친 상황에는 마인드컨트롤이 안돼서다.



율이를 낳고 한 달 정도 지나 남편이 술을 마시고 새벽 4시에 돌아온 적이 있다. 아기는 지칠 줄 모르고 우는데 집안일은 쌓이고 하루 종일 먹은 것은 물 한 모금이 다였다.

시곗바늘이 새벽 1시를 가리킬 때를 기다렸다가 나는 여행가방을 쌌다. 허둥대며 현관문을 여는 남편 얼굴을 보자마자 핸드폰을 집어던지고 집을 나가버렸다. 한겨울 새벽 영하 날씨에 생후 한 달짜리 아기를 안고 동네를 헤매던 남편이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던 나를 발견했을 때 거짓말같이 화가 풀렸다.



남편이 회사를 그만두고 육아를 하면서는 반대의 상황이 됐다. 한 번은 회식하느라 자정 넘어 왔는데 늦을 만한 이유가 있었다. 출퇴근만 세 시간 거리라 회식에서 일어난 시간은 10시를 조금 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편이 화난 이유는 단지 늦어서가 아니라 일부러 연락을 두절한 내 행동이었다.



부부싸움을 하다 보면 주로 화를 내는 쪽은 주양육자다. 혼자서 아이를 볼 때는 아내나 남편의 귀가만 기다리는데 그 시간이 때로는 수십 시간처럼 느껴진다. 나도 모르게 신경이 날카로워져 상대방을 눈치 보게 만들었다.

육아를 직접 해보지 않은 사람은 때때로 “아이 우는 거 신경 쓰지 말고 밥 먹으면 되잖아.”, “집안일은 내가 퇴근하고 할 테니까 내버려둬.”라는 말을 하는데 안 하는 게 나은 말이다.



갓난아이를 보며 집안일하는 사람에게는 혼자만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배고픔을 못 견뎌서가 아니라, 집안일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식사다운 식사를 할 수 있는, 단 30분이라도 오로지 자기만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특별히 뭔가를 하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참을 수 없을 만큼 화나는 순간도 그 상황을 벗어나 다시 생각해보면 아무 일도 아닌 때가 많다.

회사를 출근하는 사람이 덜 힘들다는 뜻은 아니다. 온종일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안식처로 돌아갔는데 더 힘든 육아와 집안일이 기다리고 있다. 오죽하면 회사에서 퇴근해 집으로 출근한다는 말이 있을까. 잠깐 눕고 싶어도 안되고 사색할 시간도 없는, 쉬지 않고 움직이는 톱니바퀴 같다.



두 아이를 안은 남편



“둘 다 해보니 뭐가 더 힘들어?”
남편은 운동을 좋아해 체력이 좋은 편인데도 “군대에 다시 온 것 같다. 아니 군대보다 더 힘들다.”고 말했다.



요즘 우리 부부의 최대 과제는 집안일 분담이다. 맞벌이, 외벌이를 떠나 부부생활의 가장 중요한 문제다. 누군가의 일이라고 정해놓지 않으면 일주일치 빨래나 설거지가 산더미같이 쌓이고 집안이 쓰레기장처럼 됐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역할도 정해보고 담당 요일도 나눠봤지만 다 정답이 아니었다.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야근이나 회식으로 도저히 집안일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내 몫’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책임 회피의 소지가 생긴다. 이것은 또 다른 분쟁의 불씨가 됐다.
부부라면 내 일 네 일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설거지 한번 대신해줄 수도 있는 것을.



최근 들어 우리는 대부분의 집안일을 주말에 몰아서 하지만 아이들 도시락 설거지만은 담당 요일을 나눠 번갈아 하기로 정했다. 매일 아침 설거지하느라 물기가 남은 밀폐용기를 책가방에 넣어 보냈더니 곰팡이가 잔뜩 생긴 것이다. 만약 내 차례인 날 야근이나 회식 때문에 늦으면 남편이 대신해놓기도 한다. 그때그때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사람이 최선을 다하는 것, 일상생활에서 당장 눈앞에 보이고 실천 가능한 작은 일을 각자 하는 것이 보다 해답에 가까운 방법이다.



회사일과 육아, 둘 다 힘들기 때문에 누가 더 힘드냐는 논쟁은 시간과 감정을 소모시킬 뿐이다.
서로의 입장이 돼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이해받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이해할 수 없으므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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