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 친정엄마의 육아일기

by 노향

어느 날 정말 뜬금없이 생각난 일이다.

나는 중학교 시절 학교폭력을 당했다. 집단따돌림이나 물리적폭력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몇몇 무리에게 왕따놀이 비슷하게 용돈을 삥뜯기는 일이 약 1년 정도 지속됐다.


까맣게 잊고 잊던 그 일이 왜 갑자기 기억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친정엄마를 떠올리다가 그런 것 같다.


내 친정엄마는 가냘프고 늘 힘이 없어 보이는 전업주부였다. 한번도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는 것을 본 적이 없고 내 눈에는 보잘것없이 불쌍하기만 한 아줌마였다.

그런 친정엄마에게 마지못해 왕따를 당하는 사실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사나흘이 멀다 하고 용돈을 빼앗긴 바람에 돈을 타려면 거짓말을 해야 했고 결국 들통이 난 것이다. 사실은 누군가에게 간절히 말하고 싶었던 비밀을 가장 편한 사람에게 고백한 셈이다.


나는 그 일을 지금도 후회한다. 그때 엄마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를 짐작하면 지금 글을 쓰면서도 눈물이 날 것 같다.

엄마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돈을 빼앗은 아이의 이름과 집주소를 집요하게 물었고 당장 나를 데리고 택시를 잡아탔다.

가는 내내 불안했다. 누구와 싸우는 엄마의 모습을 한번도 상상해보지 않았고 엄마는 나를 지켜주기엔 힘이 부족한 사람이니까.


내가 우려한대로 엄마는 그동안 빼앗긴 돈을 돌려받지 못했다. 그 애 엄마가 돈을 빼앗았다는 증거도 없으면서 애먼 사람을 잡는다고 했고 그 애 역시 시치미를 뚝 뗐기 때문이다.

약 30분간의 실랑이 끝에 아무 소득 없이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나는 절망하지 않았다. 엄마가 영웅처럼 보였고 든든했다.


그런 엄마가 나처럼 육아일기를 썼던 기억도 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왕따사건 때만큼 놀랐다. 결혼 전엔 서울로 상경해 직장생활까지 한 엄마인데도 나는 그게 신기하기만 했다.

엄마는 늘 집에서 밥을 하거나 설거지를 했고 청소와 빨래하는 모습이 익숙했지, 나처럼 글씨를 쓰고 무언가를 고민하는 모습 자체가 의외였기 때문이다.


엄마의 일기는 두꺼운 공책에 연필로 쓰여있었다. 내용은 분명히 기억나지 않지만 글씨가 가지런히 예뻤던 것과 나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던 것, 때로는 엄마가 지은 자작시도 있었던 것 등이 생각난다.


살면서 딸이 친정엄마에게 저지르는 수많은 잘못을 글로 쓰라고 한다면 아마 나는 시간이 부족해서 쓰다 말고 죽을 것이다.

남들이나 시어머니에게 쓰는 관심과 친절의 절반만 써도 친정엄마에게 이렇게까지 죄책감을 안고 살지는 않을텐데.


엄마처럼 나도 아이 둘의 엄마가 될 준비를 하다보니 이제서야 조금은 보이는 것 같다. 엄마의 삶이, 엄마의 세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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