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결혼이라는 시작 - 무너지기 전의 꿈

예쁜 시작인 줄 알았던 전쟁

by merry

결혼을 결심한 순간, 나는 곧장 ‘전쟁터’에 들어섰다.

사랑만 있으면 충분할 줄 알았던 그 시절의 나는

‘결혼 준비’라는 이름 아래

숱한 요구와 체면의 무게 앞에서 자꾸만 작아져야 했다.


시작은 혼수였다.

시어머니는 A4용지에 빼곡히 적힌 리스트를 내밀었다.

명품 가방, 다이아 반지, 금 세트, 놋그릇, 고급 가전제품,

결혼식 때 친척들께 돌릴 이불세트까지…

마치 백화점 청구서를 나열해 놓은 듯했다.


내게 그것은 ‘혼수’라기보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체면용 목록’처럼 느껴졌다.

왜 이런 허례허식을 해야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 조금 줄여서 준비하면 안 될까요?”

조심스럽게 여쭈어보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단호했다.


“요즘은 이 정도는 기본이야.

체면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 말이 내 마음을 천천히 구겨나갔다.

내가 꿈꾸던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따뜻하게 시작하는 삶이었지,

명품과 예단 목록으로 흥정하듯 준비하는 의식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굳게 다짐하고 있었다.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겠다.”

서른이 되도록 묵묵히 나를 키워준 부모님께

이제 와서 또 금전적인 짐을 얹어드릴 순 없었다.

부모님의 노후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럴 수 없었다.


결혼은 내 선택이었고,

그 무게 역시 내가 온전히 짊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을 스스로 준비했다.

예단비도, 혼수도, 예물도.

월급을 쪼개고, 적금을 깨고, 통장을 비워가며

하나씩,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해나갔다.

물론 무리한 요구 전부를 받아들일 순 없었기에

리스트를 조정하고 빼며 현실적인 선을 맞췄다.


시어머니의 반복되는 요구에

나는 최대한 예의를 갖춰 말씀드렸다.


“어머니, 결혼은 이윤 남기는 장사가 아니잖아요.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정성껏 준비하겠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이랬다.


“사돈도 딸 보내면서 기본으로 그 정도는 해주는 게 맞는 거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딘가 크게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때 멈춰서 더 깊이 고민했어야 했는데,

나는 또 그냥 참고, 넘기고, 감당해 냈다.


결혼식 한복을 맞추던 날도 마찬가지였다.

엄마와 함께 한복집에 가서 사이즈를 재고 있었는데,

시어머니는 갑자기 말을 끊고

“내가 봐둔 데가 있다”며 우리를 데리고 나가버렸다.

우리가 고른 곳은,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 순간, 마음 한쪽이 뚝 꺾였다.

엄마를 무시하는 듯한 그 태도에

속이 타들어갔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속으로 되뇌었다.

‘아… 이건 아닌데. 진짜 아닌데.’


진심으로, 시어머니라는 사람은

자신과 자신의 아들이 세상에서 제일 잘났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어느 날은 백화점에서 만나자고 하셨다.

가보니 명품 가방을 사주 시겠다며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셨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명품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늘 일, 집, 학교를 오가며 살아온 나에게

명품을 들고 갈 곳도, 필요도 없었다.

그저 실용적인 가방 하나면 충분했으니까.


그러나 시어머니는

가방을 고르며 또다시 놋그릇과 예단,

분수에 맞지 않는 요구를 꺼내셨다.

사주는 척, 베푸는 척하면서

사실은 더 많은 걸 바라시는 듯했다.


쉬는 날 반나절을 백화점에서 보내고,

함께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머니, 저 명품 안 필요해요.

사람이 명품이어야지,

가방 하나 든다고 사람이 달라지진 않잖아요.

저는 그냥, 적당한 브랜드 가방으로도 충분해요.

그러니까 필요 없는 데 돈 쓰지 마세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시어머니의 얼굴에 스친 표정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당황, 불쾌, 실망…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시어머니와 불필요한 언쟁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때,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돌이켜보면 참…

그때 그만두었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걸 참고, 이해하고, 넘기는 것이

어른스러운 선택이라 믿었다.

어리석게도 말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그저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

입술을 깨물고, 또 깨물며 삼켰다.


‘이게 결혼이라는 건가…

이게 어른이 되는 거구나.’

스스로를 다독이며

그 무리한 요구들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사랑’보다 ‘체면’을 중시하는

누군가의 기준에 조용히 순응하고 있었다.


그게 옳은 줄 알았다.

그래야 좋은 며느리, 괜찮은 신부가 되는 줄로만 믿었다.


하지만,

말하지 못한 내 마음은

결혼식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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