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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정해준대로 사는 건, 재미 없지않나

마음껏 거스르자, 내 마음이 이끄는대로.

by 메리힐데

누가 뭐래도 하고싶은 대로 할 권리는 우리 모두에게 있다.


나는 천주교인이다. 요즘엔 매일 아침 그날의 복음을 묵상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 복음에서 나는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애쓰며 불안하고 초조해하는 사제들과 레위인을 봤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서 자신을 증명하려 애쓰는 사람들의 불행한 얼굴을 본다. 그리고 그 중에 나도 있다.


반면 자신의 정체를 묻는 질문에 대한 요한의 답변은 결국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라는 것 뿐이다. 만일 내가 그곳에서 요한을 보고 있었다면 그의 표정이 어땠을까 상상해봤다. 그의 태도는 여유롭고, 당당하고 자유로워 보인다.


나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참 애쓰며 살았다. 지금도 관성처럼 나도 모르게 공동체 안에서, 학교에서, 혹은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 안에서 은연중에 스스로를 증명하려 애쓴다. 그리고 증명에 실패한 것 같을 때, 인정받지 못한 것 같을 때, 얼마나 안달내고 불안해하는지 모른다. 딱 성경 속 사제들과 레위인이 바로 지금 내 모습이다.


반면 오늘의 복음 속 세례자 요한은 스스로를 증명하기는 커녕 오히려 아무것도 아닌 채로 있기를 바라는 듯 보인다. 그가 증명하고 싶어 하는 건 그리스도뿐. 그에게 있어 자기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닌 존재’일 뿐. 요한은 그저 자신이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이길 바랄 뿐이다.


나는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로스쿨에 들어와 곧 졸업을 앞두고 있다. 여기까지 온 것은 많은 환경적 요인이 있었지만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됐다. 다만 사람을 살리는 수단으로서의 법을 공부하며 지식은 차오르고 있었지만 이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사람을 살릴 수 있을지에 대한 지혜는 키워나가지 못했다. 내가 공부한 것으로 변호사 자격증을 딸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사람을 살리지는 못할 것 같다는 불안도 함께 들었다. 그렇게 한 동안 방황아닌 방황을 했다.


그러다 문득 성경이 눈 앞에 보였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요한 1,17). 성경 속 살아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내가 가진 수단들을 어떻게 사용해야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넌 언제까지 공부만 해?”, “그냥 공부하기 싫고 시험이 두려워서 피하려는 거 아니야?”라는 질문이 나를 두렵게 했다. “하느님한테 물어보면 답이 나와?”, “하느님은 약한 인간이 의지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허상에 불과해”, “보이지도 않는 것에 인생을 걸지마.”라는 말도 두려웠다. 나의 신념을 부정당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틀렸다고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무서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확신하는대로, 내가 진리가 있다고 믿는 곳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굳이 증명할 필요 없이.


성경을 읽다보면 하느님께서는 선행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를 하는 이의 마음을 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꼭 흥부와 놀부 얘기처럼 말이다. 제비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다리를 치료해준 흥부와 박씨를 얻기 위해 제비를 치료한 놀부. 행위만 놓고보면 같아보일 수 있지만, 그들의 마음이 매우 다르다.


사랑이 있고 없음, 이것이 내게는 가장 중요한 가치다. 우리는 모두 어릴 때부터 동화책이나 선생님, 부모님, 친구들을 통해 행위보다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운다. 다만 먹고 사는 일에 치여 잠시 잊을 때가 있을 뿐.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이 하느님께 받은 가장 큰 선물이 ‘자유의지’라고 한다. 자유의지가 없다면 우리는 그저 하나의 로봇에 불과할 뿐이니까. 입력한 대로 살아가는 로봇들의 세상이라면 사랑의 마음으로 시작된 창조의 의미가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자유의지와 함께 우리가 받은 큰 선물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양심’이다. 내가 선(善)이 아닌 것으로 기울 때, 나를 깨워주는 존재. 약한 나를 선으로 이끌어주는 정말 고마운 존재. 나의 수호천사가 내게 말하는 창구가 되는 곳, 바로 우리 모두 마음에 가지고 있는 양심이다.


나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을 통해 세상을 본다. 주님께 속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작음을 발견할 때 감사함을 느끼지만, 자신을 증명하려는 사람들은 자신의 작음을 발견할 때 초조하고 실망스러움을 느낀다. 주님께 속한 사람은 주님의 뜻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길 바라지만 자기 자신에게 속한 사람은 자신의 뜻이 주님을 통해 이루어지길 바란다.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는 봉사가 아니라, 나를 통해 드러나는 ‘예수님’을 기억하는 봉사를 하면서 살고 싶다. ‘내가 그리스도가 되려 하는 것은 아닌가?’ 계속해서 살피면서 요한처럼 그 분을 증언하는 삶을 살고싶다.


남들이 자신을 무어라 생각하든 그건 네 생각이고. 내 마음이 시키는대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하루로 인생을 채우고 싶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느라고 자기 자신 조차 사랑하지 못하기엔 나의 시간이, 그리고 나의 사랑이 너무 아깝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6)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 8,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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