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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고전’ 혹은 ‘세계명작’이라고 불리는 책 가운데 <돈 키호테>만큼 유명하면서도 그 내용이 잘못 알려진 작품은 많지 않을 것이다. 미겔 세르반테스의 소설 제목이자 그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한 돈 키호테는 흔히 ‘무모한 기사의 우스꽝스러운 모험담’으로 대변되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시중에 판매되는 이 책의 표지에는 대부분 비루먹은 말을 타고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깡마른 기사가 그려져 있으며, 그 모습은 우리 머릿속에 각인되어 돈 키호테가 웃기고 바보 같은 인물이라는 고정관념으로 굳어졌다.
하지만 이 모든 대중적 이미지 가운데 돈 키호테를 제대로 묘사한 표현은 하나도 없다. 아니, 애초에 이 작품과 인물의 성격을 단어 몇 개로 규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돈 키호테는> 가벼운 모험 이야기가 아니라 2,000페이지에 육박하는 장편 소설이며, 그 안에는 작가가 교묘한 플롯으로 짜맞춘 온갖 에피소드들이 입체적으로 엮여 있다. 스페인 역사상 최고의 작가라는 칭송에 걸맞게, 세르반테스는 웃기면서도 먹먹하고, 기괴하면서도 가슴 저린 이야기로 독자들을 말 그대로 들었다 놨다 한다. 이 매력적인 스토리에 정신없이 끌려 다니는 동안, 우리는 ‘무모한 기사’라는 좁은 틀에 가둘 수 없고, ‘우스꽝스러운 모험담’이라는 한정된 수식어로 정의할 수 없는 이 작품의 진짜 매력을 마주하게 된다.
<돈 키호테>는 스페인 라만차 지역의 가난한 하급 귀족 알론소 키하노가 떠나는 세 번의 모험 여행과 그 사이에 겪는 다양한 일화로 구성되어 있다. 훌쩍 큰 키에 볼품없이 깡마른 이 노인은 기사도 소설을 너무 읽은 나머지 자신이 진짜 기사이며, 당장 세상을 구할 모험을 떠나야 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쉽게 말해서 미친 것이다. 머릿속으로 만들어낸 기사 캐릭터에 도취된 그는 스스로 ‘키호테’라는 그럴싸한 이름을 짓고 그 앞에 귀족을 뜻하는 경칭인 ‘돈’까지 붙인 뒤 자기 마음대로 ‘라만차의 기사 돈 키호테’가 된다.
멋진 이름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레이디의 존재였다. 그가 지금껏 읽었던 기사 소설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운 귀족 부인이나 숙녀를 자신만의 레이디로 모시며 평생 사랑과 헌신을 바쳤다. 머릿속으로 적당한 후보를 물색하던 그는 이웃 마을에 살던 처녀 한 명을 떠올리고, 그녀에게 둘시네아 델 토보소라는 밑도 끝도 없이 거창한 이름을 붙인 뒤 혼자만의 레이디로 삼는다. 현실의 그녀는 투박한 외모를 지닌 평범한 농부의 딸이지만, 이 정도의 장애물은 망상의 힘으로 가볍게 극복한다.
이런 식으로 기사에게 필요한 조건들을 갖춰나가던 돈 키호테는 7월 중에서도 가장 무더운 어느 날 새벽, 드디어 진짜 모험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집안에 굴러다니던 엉성한 투구와 창으로 무장하고 주인만큼이나 볼품없는 말의 안장에 올라탄 채 세상의 악과 맞서 싸우기 위한 첫 번째 여정을 시작한다.
신출내기 기사 돈 키호테가 여행길에서 처음으로 마주친 모험 장소는 마을 근처의 여관이었다. 망상의 지배를 받는 그의 눈에는 초라한 여관 건물이 웅장한 성벽으로, 무뚝뚝한 주인은 지체 높은 성주로 보인다. “고귀하신 성주님. 돈키호테 데 라만차, 이것이 제 이름이외다. 무기가 장식이요, 전투가 휴식인 이 기사에게 하룻밤 잠자리를 내어주시겠습니까?”
여관 주인은 느닷없이 창과 방패를 차고 나타나 시를 읊어대는 손님이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하다는 사실을 한 눈에 알아보지만, 적당히 놀려먹다가 돈이나 뜯어내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순순히 숙박을 허락한다. 문제는 기사도를 향한 돈 키호테의 열정이 주인의 예상을 아득히 초월한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갑옷에 손을 댔다는 이유로 마부에게 창을 휘두르고, 투숙객들과 시비가 붙어 돌팔매질을 당하며, 그 와중에도 자신이 진짜 기사라도 되는 양 사람들을 향해 호통을 쳐댄다. 여관 주인은 그제야 자신이 새로 온 손님의 광기를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태가 더 심각해지기 전에 이 미치광이 노인을 쫓아내야 한다고 판단한다. 그는 일단 기사도 운운하는 헛소리에 적당히 장단을 맞춰 주며 돈 키호테의 기분을 가라앉힌 뒤, 적당한 타이밍이 오자마자 돈도 받지 않고 허둥지둥 그를 내보낸다.
여관을 나선 뒤에도 돈 키호테의 만행은 멈추지 않는다. 그는 멀쩡히 길을 가던, 열 명도 넘는 상인들의 앞을 가로막더니 자신의 레이디 둘시네아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라며 으름장을 놓는다. 상인들은 뜬금없이 나타난 광인을 무시하며 가던 길을 가려 하지만, 돈 키호테는 기사도를 모욕당했다며 다짜고짜 무기에 손을 댄다. 하지만 이번 상대는 수적으로도 우세한데다 건장한 하인들까지 거느린 상인 무리다. 그들은 길을 방해하고 시비를 걸어온 가짜 기사를 순순히 보내주는 대신 따끔하게 혼내주는 쪽을 택한다. 불쌍한 돈 키호테는 창이 부러지고, 갑옷이 우그러지고, 그 속에 담긴 몸이 ‘맷돌에 갈린 밀처럼’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맞은 뒤 길가에 처참하게 버려진다.
마침 근처를 지나던 농부가 그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대로 길바닥에서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농부는 몽둥이질로 박살난 투구 아래서 동네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 영문은 모르지만 일단 그를 집에 데려다줘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라만차의 위대한 기사 돈 키호테의 첫 번째 모험은 달랑 1박 2일 만에 초라한 모양새로 허무하게 마무리된다. 부서진 창과 갑옷을 주섬주섬 둘러맨 채, 만신창이가 된 몸을 농부의 당나귀에 겨우 의지하면서.
돈 키호테의 기행은 당연히 가족과 지인들을 발칵 뒤집어 놓는다. 그를 곁에서 모시던 가정부는 이 모든 것이 기사 소설 때문이라며 서재 한가득 꽂혀 있던 책들을 전부 불살라버리고, 가장 친한 친구인 마을의 신부와 이발사는 어떻게든 그의 정신을 돌려놓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한다. 하지만 지인들의 호소도, 사람들의 비웃음도, 죽기 직전까지 구타당했던 기억도 돈 키호테의 상상 속 기사도를 꺾지는 못한다. 오히려 그는 첫 번째 여행의 실패가 준비 부족 탓이라고 생각하며, 이번에는 더 철저히 준비해서 진짜 기사다운 모험을 하리라고 다짐한다.
그의 ‘철저한 준비’ 목록에 포함된 것 중 하나가 바로 종자였다. 혼자 하는 여행의 한계를 체감한 그는 자신의 수발을 들고 필요한 경우 지원군이 되어줄 종자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레이디 때와 마찬가지로 동네 사람들 가운데 후보를 물색하던 그는 이웃에 사는 우직한 농부 산초를 떠올리고, 모험을 성공적으로 마치면 부와 명예를 거머쥐게 된다며 그를 꼬드긴다.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소리지만, 조금 세속적이고 많이 어리숙한 산초는 그 말을 덜컥 믿고 그를 따라가기로 한다. 생각보다 쉽게 종자를 구한 돈 키호테는 재산을 처분하여 여비를 마련하고 부서진 무기들을 수리하며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마침내 모험에 필요한 물건들이 모두 갖춰진 어느 날 저녁, 기사가 탄 말과 종자가 탄 당나귀는 남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마을을 벗어난다.
‘돈 키호테’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 유명한 풍차 사건이 일어난 것은 이 두 번째 여행이다. 마을을 막 벗어나 들판에 접어들었을 무렵, 모험심으로 똘똘 뭉친 기사 양반의 눈앞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거인 부대가 나타난다. 물론 그 실상은 바람의 힘으로 방아를 돌리는 서른 대의 풍차지만, 돈 키호테는 아직 주인 나리의 상태를 잘 모르는 종자가 채 말릴 새도 없이 전속력으로 말을 몰아 풍차의 날개, 아니 거인의 팔에 창을 꽂아 넣는다. 하지만 야속한 풍차는 신음 하나 없이 멀쩡하고, 설상가상으로 마침 불어온 바람에 날개가 돌아가면서 우리의 가련한 영웅은 말에서 떨어져 사정없이 패대기쳐진다.
이후에도 비슷한 양상의 사건들이 계속된다. 돈 키호테는 있지도 않은 기사도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지도 않는 레이디의 가호를 빌며 사람, 짐승, 물건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결투를 신청하고, 그 결과는 대부분 비참한 패배로 돌아온다. 여행이 얼마쯤 지속되었을 무렵, 그는 손가락 두 개가 뭉개지고, 어금니가 몽땅 빠지고, 한쪽 귀가 절반쯤 잘려 나간 신세가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단순한 미치광이에 민폐 덩어리였던 돈 키호테의 캐릭터가 이 즈음부터 서서히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 제정신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끝없이 부상당하고 가진 것을 모두 잃어가면서 ‘세상을 구하기 위해’ 돌진하는 그의 모습을 마냥 우스꽝스럽게만 여길 수 있는지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그의 모험을 쭉 지켜본 이들은 여기에 일종의 패턴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다. 닥치는 대로 사고를 치는 듯 보여도, 가만히 보면 그는 절대 약자를 건드리지 않고,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으며, 가장 큰 위험은 본인 혼자서 감당하려 한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거대한 괴물의 쇠사슬 소리를 들었을 때, 그는 산초를 안전한 곳에 대피시키고 유언까지 남긴 채 홀로 목숨을 건 싸움을 준비한다. “내가 죽으면 레이디 둘시네아에게 부고를 전해주게. 악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다 용감하게 떠났다고 말이네.” 물론 몇 시간 뒤 괴물의 정체는 단순한 물레방아로 밝혀지지만, 이런 사실을 몰랐을 때 돈 키호테가 내비친 용기와 배려를 떠올리면 웃기면서도 마음 한편에 찡한 울림이 전해진다.
망상에서 비롯된 가짜 모험이 진짜 선행으로 이어지는 (얻어 걸린) 경우도 생긴다. 여행 중 지나게 된 한 마을에서, 그는 빼어난 미모 때문에 곤란에 빠진 한 여성의 사연을 듣는다. 마르셀라라는 이름의 이 여인은 외모와 별개로 진취적인 성격에 경제적 능력까지 갖춘 터라 누구와도 결혼할 마음이 없지만, 그녀의 예쁜 얼굴에 반한 마을 청년이 끝없이 구애를 하다가 급기야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바람에 난감한 처지에 놓여 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그 청년을 유혹한 적이 없지만, 사람들은 죽은 이만 동정하며 그녀를 악녀로 몰아붙인다. 온 세상에 마르셀라를 욕하거나 쫓아다니는 사람밖에 없는 그 상황에서, 돈키호테는 숙녀를 구하기 위해 마을 전체와 맞선다. “신분이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이 여인의 뒤를 쫓는 자는 내 분노를 받을 각오하시오!” 이번에는 투구를 눌러쓰고 죽을 듯이 창을 휘두르는 그의 광기가 선한 힘을 발휘하고, 마르셀라는 안전하게 그곳을 빠져나간다.
이렇게 위태로운 듯 순조롭게 진행되던 두 번째 여행은 예기치 못한 흉계(?)에 의해 갑작스레 끝나버린다. 고향에서 정신 나간 친구의 안전을 걱정하며 노심초사하던 지인들이 그를 데려오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비밀 작전을 세운 것이다. 그들은 비정상인 사람을 정상적인 방법으로 설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미친 친구의 눈높이에 맞춰 연극을 하기로 작정한다. 수소문을 통해 돈 키호테의 소재를 파악한 신부와 이발사는 아름다운 여인을 한 명 섭외한 뒤 그녀에게 미코미코나 공주(...)라는 역할을 주고, 자신의 나라인 미코미콘 왕국에 끔찍한 위기가 닥쳤다며 돈 키호테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부탁한다. 미코미콘 왕국에 가는 길이라고 속여 그를 고향 마을까지 유인한 뒤, 힘을 써서라도 집으로 데려온다는 계획이었다.
모두의 예상대로, 돈 키호테는 가련한 공주의 눈물을 뿌리치지 못한다. 그의 곁에 있던 순진한 산초까지 미코미콘 왕국의 존재를 믿어버리게 된 부작용이 일어나긴 했지만, 어쨌든 미코미코나 공주는 돈 키호테와 산초를 마을 근처의 여관(첫 번째 여행에서 돈 키호테가 민폐를 끼쳤던 바로 그곳)까지 데려오는 데 성공한다. 수행원으로 변장한 채 뒤를 따르던 신부와 이발사는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여관 주인의 인내심을 또 한 번 시험하는 사소한 격투와 에피소드 끝에 친구를 마을로 데려오는 데 성공한다. 위대한 기사의 두 번째 모험은 소가 모는 달구지에 실려 온 동네 사람들에게 즐거운 구경거리를 선사하면서 훈훈하게 마무리된다.
우여곡절 끝에 돌아온 돈 키호테는 약 한 달간 얌전히 집에 머무른다. 그 사이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그가 또 다시 헛생각을 품지 못하도록 ‘기사’ 혹은 ‘모험’과 연관된 모든 이야기를 철저히 금지하며 어떻게든 망상벽을 치료하려 애쓴다.
하지만 지인들의 바람과 정 반대로, 바깥세상의 분위기는 점점 그의 모험을 부추기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 첫 번째 주범은 바로 산초였다. 주인 나리와 함께 온갖 사건을 겪으며 고생도 많이 했지만, 그 끝에 (많은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돈 키호테에게 진심 어린 존경을 느끼게 된 산초는 그와 다시 한 번 여행을 떠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해진다. 맨 처음에는 부귀영화를 준다는 꼬드김에 빠져 주인을 따라나섰던 그지만, 이제는 오히려 그가 주인을 꼬드기는 상황이 되었다. 두 번째 주범은 바로 뜻하지 않게 생겨난 유명세였다. 돈 키호테와 산초가 겪은 모험담이 입소문을 타고 전국에 퍼져나갔고, 심지어 누군가 그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 팔기까지 하면서 두 사람이 얼떨결에 스타덤에 오른 것이다.
지인의 입을 통해 자신의 명성 이야기를 전해들은 돈 키호테는 더 이상 모험을 미룰 수가 없다고 느낀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태세인 그를 보고 걱정이 된 가정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마을에서 가장 똑똑한 인재인, 큰 도시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는 학사를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그런데 이 학사라는 사람이 가관이다. 가정부를 따라서 돈 키호테의 집까지 오긴 왔는데, 그를 말리기는커녕 한시바삐 모험을 떠나라고 부추기는 것 아닌가.
싱글싱글 뜻 모를 웃음을 짓는 학사와 배신감에 소리를 치는 가정부를 두고, 돈 키호테는 잽싸게 산초를 불러온 뒤 룰루랄라 세 번째 여행을 떠난다.
이번 여정은 앞선 두 모험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돈키호테는 늘 그랬듯 투우용 소떼에 깔리고, 집채만 한 사자에게 달려들고, 도적떼에게 덤볐다가 본전도 못 찾는 바보짓을 이어간다. 하지만 이번에는 중간 중간 마주치는 사람들의 태도가 예전과 사뭇 다르다. 그와 산초를 알아보는 사람도 많고, 어떤 이들은 직접 자기 집으로 모셔서 식사를 대접하기까지 한다.
그 중 최고의 일화는 공작 부부의 성에 초대받은 사건이었다. 초원을 가로지르던 돈 키호테와 산초는 우연히 사냥을 나온 공작 부인과 마주치는데, 마침 그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책에 푹 빠져 있던 부인은 두 사람을 자신의 성에 정식으로 초대한다. 작품 초반에 초라한 여관을 웅장한 성으로 착각하며 비웃음을 샀던 미치광이 기사가 진짜 궁궐에 입성한 것이다.
장난기 많은 공작 부부는 우연히 모신 손님에게 정성스런 환대를 베풀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특별한 여흥을 즐기려는 계획을 세운다. 시간과 돈이 넘쳐나는 귀족답게, 그들은 엄청난 물량과 인력을 쏟아 부어 돈 키호테와 산초를 놀려먹을 무대 장치들을 마련한다. 예를 들어, 어느 날엔가는 하늘을 나는 말을 구해왔다며 두 사람을 목마에 앉히고, 멀미가 나면 안 된다는 핑계로 눈을 가린 뒤, 시종들을 동원하여 송풍기로 엄청난 바람을 일으킨다. 망상이 특기인 기사와 주인의 망상에 전염된 종자는 진짜 하늘을 날고 있다는 믿음에 사로잡힌 채 목마 위에서 온갖 호들갑을 떨어댄다. “산초여, 우리가 두 번째 대기권에 진입한 모양일세.” “태양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아요, 주인님!” 이 모습을 지켜본 공작 부부와 시종들이 웃음을 참느라 실신하기 직전까지 갔음은 물론이다.
이 외에도 집사와 시종들에게 악마 분장을 시켜서 내보이거나, 공작이 다스리는 마을 하나를 통째로 동원해서 산초를 영주님으로 모시는 척 연기하게 만드는 등 블록버스터급 장난이 이어진다. 사실 공작 부부의 행동은 상대방을 가지고 노는, 관점에 따라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 희롱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장면들이 묘한 따뜻함을 자아내는 것은 돈 키호테 본인이 그 상황을 진심으로 즐기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가벼운 장난일 수도 있지만, 그 장난을 현실로 받아들인 돈 키호테에게는 이 모든 사건이 진정한 모험이요, 꿈이 실현된 순간이다. 하늘을 나는 말을 타고, 악마와 대적하고, 충직한 종자에게 떡 하니 영주 자리를 내어주면서, 그는 미치지 않았다면 결코 누리지 못했을 삶의 희열을 느낀다.
게다가 공작의 세심한 배려 덕분에 호화로운 대접을 받으면서도, 그는 절대 기사도 정신을 잃지 않는다. 어여쁜 여인을 붙여준다고 해도 마음속의 레이디 둘시네아를 떠올리며 정중히 거절하고, 산초에게도 절대 거만해지거나 분수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늘 당부한다. 그리고 성에서의 편안한 생활 때문에 몸이 나태해진다는 판단을 내리자마자 공작의 만류를 뿌리치고 다시 고생길이 훤한 모험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즐거운 여행길이 쭉 펼쳐지나 싶었는데… 매번 그랬듯이, 돈 키호테의 모험은 그를 걱정하는 지인들의 선량한 마음에 가로막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어느 날 바닷가를 걷던 돈 키호테는 스스로 ‘하얀 달의 기사’라고 칭하는 갑옷 차림의 사내와 마주친다. 투구로 얼굴을 가린 그는 대뜸 돈 키호테가 목숨처럼 여기는 레이디의 외모를 비하하며 그의 성질을 자극하더니, 맥락도 없이 결투를 제안하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진다면 레이디 둘시네아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인정하겠소. 하지만 당신이 진다면 고향으로 돌아가 최소 1년 동안 절대 칼에 손을 대지 말고 조용히 지내야 하오.”
이쯤 되면 눈치 챘겠지만, ‘하얀 달의 기사’는 돈 키호테의 고향 사람 중 한 명인 학사였다. 신부와 이발사로부터 친구에 대한 걱정을 전해들은 그는 돈 키호테가 기사도를 걸고 한 약속을 절대 어기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해 그를 집에 붙잡아둘 계획을 세웠다. 여행을 떠나라며 그를 부추겼던 행동은 결투라는 형식을 빌려 그를 확실히 조종하기 위한 ‘큰 그림’이었던 것이다.
사정을 알 리 없는 돈 키호테는 사랑하는 여인의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지만, 젊고 건장한데다 이 날을 위해 특별 훈련까지 받은 청년을 이길 수는 없다. 결국 그는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이고, 고향으로 돌아가 조용히 살겠다는 맹세를 지킨다.
겉보기에는 모든 것이 일단락된 것 같았다. 돈 키호테는 집으로 돌아왔고, 약속대로 칼과 갑옷은 건드리지도 않았으며, 모험과 기사도에 대한 망상도 완전히 그만뒀다. 지인들은 드디어 ‘남들과 똑같이’ 현실을 받아들인 그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상황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국면으로 흘러간다. 꿈을 포기한 돈 키호테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며칠이 지나지 않아 몸져 눕고, 의사가 가망이 없다고 얘기할 정도로 심각한 환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가정부와 신부와 이발사와 학사는 그제야 자신들이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무엇을 빼앗았는지 깨닫는다. 돈 키호테에게 꿈은 곧 생명이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미처 알지 못했다. 미쳐도 좋으니 살아만 달라고, 다시 한 번 즐거운 모험을 떠나라고 외쳐보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침대 위에서 완전히 제정신으로 돌아온 돈 키호테는 차분히 남은 날들을 정리한다. 친구인 신부를 불러 고해성사를 하고, 얼마 없는 유산을 공평하게 분배하고, 괜히 자신의 망상에 끌어들여 미안하다며 산초에게도 일정한 몫을 떼 준다. “나리, 죽지 마세요. 우리 약속한 대로 들판으로 나가 세상을 구하자고요.” 산초가 울부짖지만, 주인은 힘없이 웃으며 사실 기사 같은 것은 없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상속’이니 ‘공증’이니 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유언을 담담하게 마친 뒤 자리에 누워 정신을 잃는다. 얼마 후 그는 조용히 세상을 떠난다.
미쳤을 때나 제정신이었을 때나 착하고 다정했던 사람, 그래서 모두에게 사랑받고 모두를 즐겁게 해주었던 사람, 돈 키호테는 그렇게 지인들의 눈물과 애도 속에 땅에 묻힌다.
‘하얀 달의 기사’가 바친 그의 묘비명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난다. “그는 온 세상을 하찮게 여겼으나, 세상은 그가 무서워 떨었노라. 그는 미쳐서 살다가, 제정신으로 죽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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