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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메리 Oct 14. 2019

가장 진지한 고백

<나와 작은 아씨들> 출간 전 연재



“힘들 때면 내가 공주라는 생각을 해. ‘나는 공주다. 나는 요정 공주다.’ 라고 말야.”

『소공녀』의 세라 크루는 말한다.     


“난 밤마다 자기 전에 창밖에서 요정의 존재를 찾아. 부디 요정의 존재를 믿어줘!” 

『빨강머리 앤』의 앤 셜리는 말한다.     


하지만 『작은 아씨들』의 에이미 마치는 이렇게 말한다. 


“나한테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면 발견하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집으로 돌아와서 그림을 가르치며 돈을 벌 거야.”     


에이미는 현실적이다. 정말 지독히도 현실적이다. 동화처럼 맑디맑은 시선을 지닌 『소공녀』나 『빨강머리 앤』의 주인공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작품에 등장하는 세 언니나 다른 또래 친구들에 비해서도 월등하게 눈치가 빠르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밝다.


유순한 성품의 메그와 베스는 장밋빛 미래를 꿈꾸면서도 어려운 집안 사정이나 허약한 건강을 생각하며 주어진 환경 안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야심가 타입인 조는 자신의 작품으로 위대한 작가가 되리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주의자 에이미는 다르다. 그녀는 부유한 친척의 눈에 들어 모두가 부러워하는 유학 기회를 손에 넣었으면서도, 일정 기간 안에 재능을 발견하지 못하면 즉시 고향으로 돌아와 미술 교사가 되겠다는 플랜 B’를 세워둔다.


사실 그녀의 야무진 현실 감각은 떡잎부터 달랐다. 네 자매가 다함께 모여앉아 순례자 역할극 얘기를 하던 크리스마스이브 저녁, 흥미로운 스토리에 푹 빠진 언니들과 달리 막내인 에이미는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한다.      


“난 이제 그런 유치한 놀이를 하기엔 너무 나이를 먹어버렸어.”      


어머니와 아버지가 전장으로 떠나고 자매끼리 집을 지켜야 하는 낯설고 두려운 상황에서도, 가장 초연한 모습을 보인 것은 열두 살짜리 에이미였다.      


“불안이란 참 흥미로운 감정이야.”     


라는 조숙한 발언으로 언니들의 웃음보를 터뜨리면서. 


그녀는 역경 앞에서 눈물을 떨구거나, 기도를 올리거나, 현실을 회피하지 않는다. 그저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플랜 B로 전환할 태세를 갖출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마냥 꿈도 희망도 없는 팍팍한 애어른인 것은 아니다. ‘유치한 애들 놀이’라고 비웃으면서도, 역할극에 나오는 순례자의 마음가짐을 가장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은 바로 에이미였다. 언니들과 대화를 나눈 뒤, 그녀는 남몰래 꼭 갖고 싶었던 색연필 세트를 포기하고 어머니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로 결심한다. 겉보기엔 그저 냉정하고 현실적인 아이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 진지하게 이상을 추구하는 인물이 바로 그녀인 것이다.


나는 유학길에 오르는 에이미의 다짐에서 지극히 그녀다운 현실과 이상의 조화를 엿보았다. 그녀가 시작도 하기 전부터 실패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은 자신의 재능을 믿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설사 위대한 예술가가 되지 못하더라도 그림을 놓지 않겠다는 결심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현실적인 한계가 닥친다 해도 어떻게든 함께할 방법을 찾겠다는 약속. 이것은 그녀가 자신의 꿈을 향해 던지는 가장 진지한 고백이었으리라.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살아가는 한 평범한 인간으로서, 나는 종종 그녀의 선택을 떠올린다. 현실을 위해 꿈을 포기하거나 꿈을 위해 현실을 내던지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 아님을, 이 당찬 소녀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감사하게도, 난 어떤 상황에서도 재미난 일을 찾아내서 기운을 차릴 수 있거든.” 


“Thank goodness, I can always find something funny to keep me up.”


-『작은 아씨들』 중에서




2019년 10월 16일부터 전국 대형 서점과 인터넷 서점에서 <나와 작은 아씨들> 단행본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


작가 인스타그램: @seo_merry

작가 유튜브: 서메리MerryS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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