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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장탕트 Aug 17. 2019

자본주의 속에서 사랑한다는 것(더 랍스터 비평)

우리는 테크노를 출 수 있을까



영화 ‘더 랍스터’는 모두가 커플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지극히도 인위적인 전제 위에서 시작된다. 이혼, 또는 사별 등으로 솔로가 된 모든 인간은 45일 동안 호텔에서 새로운 커플을 찾아야 한다. 만약 45일 동안 새로운 연인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그녀는 호텔에 입주할 당시 자신이 선택한 동물이 되어야 한다. 더 랍스터의 세상에서 생존과 커플. 그 이외의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특징 중 하나는 바로 노골적인 상징과 풍자가 넘쳐난다는 것이다. 매일 피를 흘리는 여자와 커플이 되기 위해 주먹으로 자신의 코를 친다든지, 또는 무감각하고 잔인한 여자와 커플이 되기 위해 인위적으로 잔인한 인간상을 연기하는 식의 노골적인 상징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정말 이것은 상징행위일까? 그렇지 않다. 이것은 오히려 우리네 삶의 반향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리얼리티를 자랑한다. 영화는 끊임없이 연애마저도 인위적이게 되어버린 소비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미셸 푸코에 따르면 사실 이러한 사랑이란 것도 역사를 통해 형성된 우리의 인식구조, 진리 체제에 다름 아니다. 우리도 인식하지 못하는 우세한 담론체계들이 사랑이라는 가장 뜨거운 감정마저 지배한다. 자본주의, 푸코식으로 권력이라는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네트워크 속에서 우리에게 사랑이 도대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반대로 연애를 하지 않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현대 사회에서 연애를 하지 않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타율에 의해 이루어진다. 안정성과 돈이 없는 현대인에게는 연애와 결혼은 꿈꿔서는 안 될 환상에 다름 아니다. 이는 주인공이 호텔로부터 도망쳐 만나게 된 외톨이 공동체를 통해서 잘 나타난다. 이들은 인위적으로 사랑을 막는다. 연애를 할 경우 엄중한 처벌을 받는다. 양 진영은 완전히 상반된 삶을 지향하고 있지만, 결국 그들의 삶의 모토는 ‘타율적’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영화에서 가장 상징적인 요소는 바로 ‘춤’이다. 호텔에서는 둘이서만 출 수 있는 브루스(?)를, 외톨이 공동체에서는 혼자 즐길 수 있는 일렉트로닉 음악만을 들을 수 있다. 특히 주인공이 개별적으로 이어폰을 끼고 일렉트로닉을 추는 공동체를 보고 있는 모습은 가히 극 중 최고의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가장 자율적이어야 할 사랑마저도 인위적이고, 타율적이게 된 사회, 영화는 바로 이 같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폭로한다. 그런데 이놈의 사회에서 주체적인 사랑이란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싶다. 영화 소공녀의 미소처럼 인위적인 가치 대신에 위스키와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그런 삶을 말이다. 브루스와 일렉트로닉만 가득한 세상에서 나는 테크노를 출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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