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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수 Apr 13. 2023

ADHD 약물치료 1년차

뭐가 달라졌을까




ADHD 진단을 받고 약물치료를 시작한 지 벌써 1년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1년차가 되었으니 감성에 젖어 소회를 적으려 해요. 그간 다른 플랫폼(티스토리, 포스타입)에서 약물일기를 꾸준히 썼어요. 복약과 기분기록도 노션이라는 툴에서 약 9달 동안 꾸준히 했습니다. 그 덕분에 약물치료 후 어떤 점이 달라졌고, 또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그 어느때보다도 상세히 알고 있어요. 옛날에 정신과를 다닐 땐 제 상태를 이렇게 면밀하게 모니터링한 적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제 진단명에 대해 공부한 적도 없었고요. 이렇게 꾸준히 기록할 수 있었던 것조차 ADHD 약의 효과라고 느낍니다.


다만 ADHD 약물만의 힘은 아닐 거예요. 그러니까 이 소회는 정신과 약물 치료 1년의 소회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번 진료 초반부터 기분조절제와 불안 약을 함께 먹었습니다. 지금은 아빌리파이, 리튬, 자나팜을 먹어요. 빠지지 않고 진료를 받다 보니 이제서야 정신과 진료가 뭔지 감이 잡히는 듯도 합니다.(그렇게 병원을 많이 다녔었는데 이제서야!) 아무튼, 약은 제가 움직일 수 있게 '몸'을 만들어줘요. 여전히 움직이는 건 제 몫일지라도, '몸'을 만드는 건 제 힘으로 할 수 없는 거였어요. 언젠가는 약을 먹지 않아도 이 '몸 상태'가 유지되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이 있습니다.


오늘은 '고양감'이라든가 '자아효능감 향상', '시간 감각이 생김', '덜 산만해짐' 같은 주관적인 감각은 빼고 정량적인 항목들만 추려볼까 합니다. 어차피 이 정량적인 항목들이 곧 저 자신에 대한 인식을 견인하는 것이기도 하고, 이 새로운 감각들이 다음과 같은 변화를 만든 것이기도 하니까요. 또한 지금 적을 변화들은 다른 사람의 눈에도 보이는 변화들입니다. 




1. 지각이 감소했습니다.


얼마나 지각을 많이 하며 살았는지, 얼마나 심각하게 지각했는지, 그로 인해 어떤 불이익을 자초하며 살아왔는지, 이 지각의 역사만 적어도 책 한권은 낼 수 있을 겁니다. 보는 분들은 복장이 터지실 거고요. 그러니까 결론만 말씀드릴게요. 약물치료 전에는 회사에 1주일에 나흘 꼴로 지각했습니다. 지금은 두 달에 한번 할까말까이고, 지각을 해도 10분 이상 늦지 않습니다. 거의 안 늦어요.

제 근태가 몇 주 만에 환골탈태하자, 그 전에는 해고를 고민하던 사장님이 오히려 소정의 보너스를 주시기도 했습니다...(정말 기쁘고도 쪽팔렸습니다)

이건 병원 진료도 마찬가지였어요. 예전에는 정신과 진료를 잡아도 늦기 일쑤고, 예약을 미루고, 예약을 미루다 보니 약이 없어서 띄엄띄엄 먹게 되고, 심리상담에도 항상 늦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가장 이른 진료 시간대를 예약하는데도 왠만해서는 지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의사선생님의 출근을 기다릴 때도 있어요. 그럴 땐 약간 우쭐하기도 합니다.




2. 마감을 어기는 일이 줄어들었습니다.


'미루는 버릇이 줄어들었다'고 하면 다소 모호합니다. 광범위하기도 하고요. 미루는 버릇은 약을 먹었다고 바로 좋아진 건 아니에요. 물론 약을 먹었을 땐 하고자 하는 일을 하기까지 미적거리는 시간이 드라마틱하게 단축됩니다. 하지만 제가 일을 미루고 마감을 어기며, 그럴 때마다 잠수를 탔던 데는 확실히 다른 원인도 있는 것 같아요. 심리상담을 오래 받으면서 잠수 타는 버릇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극단적으로 미루는 일도 줄었고요. 그런데 약물치료를 시작하고 플래너 등 여러 시간관리 스킬을 총동원하자 정말로 마감을 어기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그전에는 다른 분들도 제 스타일을 아니까 일정 체크를 쥐잡듯이 하시는 경향이 있었는데, 지금은 독촉도 거의 받지 않아요. 신뢰를 회복하는 건, 가능한 일이더라고요. 시간은 조금 걸려도요.




3. 감정기복이 줄어들었습니다.


저는 평소에도 별 것 아닌 일에 욱하는 일이 잦았어요. 물론 약물치료 중에 경조증이 와서 엄청 싸우러 다닌 적도 있지만... 예전에는 며칠에 한번씩 욱했다면, 지금은 한 달에 한번 욱하는 정도로 빈도가 상당히 줄었습니다. 이런 욱하는 부분에 고통받는 건 주로 가깝고 친밀한 사람들이에요. 나와 함께해 주는 사람들의 고통을 덜었다는 생각을 하면 정신과 약물을 숭배하고픈 마음마저 들 때가 있습니다.(진짜 그러겠다는 건 아니고요) 




4. 미적거리는 시간이 감소했습니다.


이 부분 때문에 제 배우자가 정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뭐를 한다고 해놓고선 1시간이고 2시간이고 느작거리는 거요. 어디 나갈 때도 준비하기까지 세월아 네월아 하곤 했죠. 배우자를 고생시킨 게 저 본인이긴 하지만, 배우자가 받았을 스트레스와 짜증이 어느 정도일지 진심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고칠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약을 먹었을 땐 이런 '예열' 시간이 확 줄어듭니다. 여전히 저희 집은 더럽지만... 그래도 몇 가지 집안일은 예전보다 훨씬 더 잘 챙길 수 있게 됐습니다. 바쁜 날만 빼고는 저녁밥을 만들어 먹을 수도 있게 되었고, 안 씻고 자는 일도 없어졌어요. 아참, 저녁밥을 만들어 먹게 됐다고 하니까 의사선생님이 엄청나게 칭찬하시더라고요. 이제 꽤 경력 있는 환자라고 생각하는데도 선생님들이 이런 걸 전심전력으로 칭찬하실 땐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황송!)




5. 두피를 덜 뜯게 됐습니다.


이건 좀 부끄럽게 느껴지는 얘기기는 한데요. 최대한 의연하게(?) 써 보겠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연필이나 종이, 손발톱을 씹는 버릇이 있었어요. 그런데 나중에는 두피를 뜯게 됐습니다. 불안정할 때는 팔의 생살을 뜯는 것으로 옮겨갔고, 나중에는 손목이나 허벅지를 긋는 자해로까지 발전했습니다. 물론 두피를 뜯는 건 아마도 ADHD의 스티밍 행동(각성을 유지하거나 집중하기 위해 반복하는 특정 움직임)에 가깝고, 자해는 다른 원인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 사이에 약하나마 연결고리가 있었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듭니다. 저는 스트레스를 받아도 두피를 뜯거든요.


원래 부모님께 물려받은 건선이 있긴 했어요. 하지만 두피를 뜯는 것 때문에 더 심해졌죠. 그런데 약물치료를 하면서 두피를 덜 뜯게 됐습니다. 그러자 건선도 어느 이상으로는 심해지지 않더라고요. 


다만 주변에 손발톱을 뜯는 사람, 머리카락을 뽑는 사람은 종종 봤어도 두피를 뜯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좀 지저분해 보이잖아요. 그런데 ADHD를 주제로 SNS 계정을 하다 보니 저와 비슷한 사람들이 더 있었어요! 그때의 감정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것 같아요. 정말로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기분이었어요. 그리고 ADHD에 대해 공부하면서 이 행동에 대해서도 더 알게 되자, 항상 은은하게 갖고 있던 수치심도 조금씩 잦아들었습니다.


지금도 뭔가에 집중할라치면 어느새 무의식적으로 두피를 뜯고 있지만, 예전보다 정도가 훨씬 덜합니다. 이 행동의 목적은 사실 좋은 것(?)이기 때문에 평생 못 고칠지도 몰라요. 그래도 어떻게 고쳐야 할지 손도 못 대고 있다가 뜻밖에 얻어걸린 효과라서 저는 매우 만족합니다. 




6. 어떤 모임이 끝나고 집에 돌아갈 때, 혼자 가지 않게 됐습니다.


이건 무슨 얘기인고 하니... 모임이 끝나고 집에 돌아갈 때, 서로 가는 방향이 같으면 같이 가기도 하잖아요? 저는 그때쯤 되면 에너지가 고갈되어서 일부러 다른 사람들 행선지를 먼저 물어보고 반대로 가곤 했어요. 집에 혼자 가려고요. 그런데 약을 먹으면 좀 편안해져서, 모임이 끝나고도 사람들과 더 같이 있을 힘이 생기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뒷풀이'라는 걸 정말 싫어했는데, 이제는 모임이 자연스럽게 파할 때까지 머무를 수 있게 됐어요. 심지어 택시를 타면 기사님과 대화하는 게 불편하지도 않게 됐습니다. 전반적으로 사람과 같이 있는 게 덜 불편해졌어요. 예전에는 어디에 있든 갑자기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는데 말이죠. 저는 지금껏 제가 내향적인 사람이라 이런 줄 알았는데, 약을 먹고 나서 드라마틱하게 편해진 부분이라 여기에도 적습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이 변화를 알아채더라고요. 좋은 방향의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위에 적은 것들만으로도 저의 마음에는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뭐를 하겠다고 신나게 얘기해놓고도 돌아서면 자신이 없어졌어요. 나 자신에게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일을 더 미루게 되었고요. 지금은 제가 어느 정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알아요. 그리고 딱 제가 예상한 만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저 자신을 통제할 수 있게 되자 주변의 신뢰가 돌아왔고, 무엇보다 저 자신도 스스로를 신뢰하게 되었어요. 이건 평생 가져본 적 없는 감각입니다. 


ADHD 약을 먹고 좋은 대학을 갔다든가, 물질적으로 성공한다든가 하는 성공담은 못 쓸 거예요. 솔직히 말하자면 쓰고 싶지도 않습니다. ADHD 치료에 대한 이상한 환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게 될 것 같아서요. 하지만 나 자신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를 통해 스스로의 능력을 믿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다 합쳐지면 '나 자신을 덜 미워할 수 있게 된다'는 것. 이것만은 열심히 강조하고 싶어요.


저는 항상 ADHD 약 용량을 쬐끔만 더 늘리고 싶어요. 30mg 이상 먹을 때 상태가 굉장히 좋았거든요. 하지만 ADHD 진단을 받으면서 다시금 양극성장애 진단도 받았고, ADHD 약 때문에 진짜로 들떠서 사고를 좀 치기도 했기 때문에, 현재는 아주 적은 용량을 먹고 있습니다. 저번에도 5mg만 늘려달라고 했다가 의사선생님께 20분 동안 잔소리를 들었네요. 그런데 지금은 부족한 듯 먹는 게 차라리 좋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부족한 부분을 메우기 위해서 노력하는 제 모습이 좋아서요. ADHD 약은 그 '노력'을 해줄 수 있게끔 해주는 거니까, 작은 용량이라 해도 제가 필요한 건 얻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불어 의사선생님께서 기분조절제는 되도록 꾸준히 먹기를 권장한다고 하셨어요. ADHD 약도 그렇지만 이쪽 약물은 언제까지 먹어야 할 지 기약이 없는 거죠. 그렇지만 저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힘든 일이 없다는 건 아니에요. 기쁘고 슬픈 일도 다 있어요. 무기력한 날도 있고 감정이 올라오는 날도 있어요. 하지만 도저히 일어날 수 없어서 일상을 포기해버린 채 몇 달이 흐르거나, 그 반대로 갑자기 폭발적으로 움직이고 사고를 치는 일이 줄었어요. 밖에 뭐가 있을지 몰라서 현관문을 못 열던 모습이 사라졌어요. 저는 완만한 롤러코스터가 됐어요. 이 레일을 약이 깔아준 거라고 한다면, 몸이 허락하는 한 먹을래요.


치료 2년차가 됐을 때 제 모습은 또 어떨까요. 그때 지금을 돌아볼 수 있도록, 이렇게 긴 글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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