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떻게 알아요
가끔은 어떻게 해야 될 지 모를 때가 있다.
사업도, 노래도, 이제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를 때.
지금이 그렇다.
내가 스스로 만든 사업체에서, 직장처럼 노동을 하고 있다.
이게 내가 바라던 인생이었던가? 자기 일을 한다는 측면에선 그렇군.
직장에 다닐 때보다는 훨씬 나아.
하지만 나는 왜 처음 사업을 시작했었더라.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남의 노동을 하는 것보다는 나의 노동을 하는 게 나아서
이러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보다 더 나은 삶이 있을 것 같은데.
노래도 마찬가지다. 실력이 늘려면 여기서 더 어떻게 해야되지.
성대 상연을 어떻게 예쁘게 접지하는것인가.
연습해도 끓는 물에 닭 넣은 소리만 난다.
분명히 이것보다 더 나은 소리를 낼 수 있을 건데.
이럴 때 예전에는 스스로를 공격했다.
뭔가 잘못 살았어! 네가 잘못 살아서 지금 인생에 답이 없는 거야!
하면서 스스로를 두들겨팼지.
하지만 거의 10년을 두들겨패다 보니, 스스로를 학대하는 것은 답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사람은 스스로를 학대하면서 괴랄한 쾌락을 느낀다.
자책의 달콤함이라고 할까.
극심한 고통에 중독적인 쾌락이 있다는 걸 알면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다.
그렇게 스스로를 학대하다 보면 자살까지도 가는 거고.
스스로를 학대한다고 모름이 앎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하지만 또 학대할수도 있겠지. 열심히 수행을 해야된다.
내가 좋아하는 영적 구루인 아디야샨티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깨달음에는 반드시 혼란이 있으니, 그 혼란과 모름 속에서 편히 쉬라고.
그러면 답이 저절로 떠오를 것이라고 말이다.
보통은 답을 모르면 스스로를 자학하거나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매사를 정해두려는 에고의 신경증적인 경향성이다.
그러나 이때 가만히 답을 기다리면 언제나 그랬듯이 답이 떠오르겠지.
따지고 보면 내가 계획해서 한 건 하나도 없으니...그게 내 무능에 대한 반증인지,
아니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해와 달을 운행하는 조화가 오늘도 내 삶에 깃들어있다고 믿고 싶다.
그 조화가 내가 바라는 인생이 아니더라도 나는 받아들이겠다.
받아들이고 받아들여서, 끝까지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