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센 남자들 손으로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운다.
회색 담장을 넘어 불청객이 들어왔다. 디딤대도 없고 다리를 걸만한 틈도 찾아보기 힘든데, 높디높은 담장을 어떻게 넘었을지 의문이 들었다. 수용자 구매물이나 공장 자재를 들여오는 트럭에 붙어 놀다 어리둥절 안으로 들어온 건 아닌지 조심스레 예측해본다.
불청객인 건 확실한 데 교도소 정문 안을 마음껏 누빈다. 직원들이 쫓아다니지만 내쫓거나 가두지 않는다. 오히려 애정 넘치는 손으로 쓰다듬고 웃는다. 흡연장에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고, 중요할 거 없는 주제로 한담을 나누던 직원들이 어느 순간부터 이 불청객을 찾아 헤맸다. 시설보수를 담당하면서 목공예에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는 직원은 아크릴 판과 상자를 이용해 손수 집을 만들어 줬고, 구매 직원(수용자 구매물 담당)은 남는 소시지 등 먹을만한 것을 챙겼고, 누군가는 사비를 털어 과자와 껌을 사주는가 하면, 지푸라기와 담요 등을 이용해 보금자리를 더욱 포근하게 만들어 줬다.
"어서 오세요 OO교도소"
불청객이 발톱을 긁으면서 현관매트에 앉아 놀고 있었다. 어딜 어서 오라는 걸까. 어딘가 어색하다. 어서 오라고 환영할 곳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몇 년 동안이나 이 매트를 밟으며 출퇴근을 했건만 이 글귀를 이제야 인지했나 보다. 여담이지만 어느 문장이든 교도소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오해가 생긴다. '요즘 집 교도소 집 교도 소하고 살아', '요즘 집 회사 집 회사하고 살아' 내게는 같은 말이나 다름없지만, 만약 나를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해명할 기회도 없이 모든 판단을 내려졌을 졌을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서 멀어졌을 것이다........
출퇴근하는 나를 반갑게 맞이하고 보내주는 불청객(자기는 그냥 혼자 놀고 있는 것일 수 도있다.)에게 나도 소소한 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점심시간 쉬는 시간마다 찾아다녔고, 장 카미유(기욤 미소의 <구해줘>라는 소설에 등장하는 고양이 이름)라는 이름도 지워줬다. 어느덧 내게 등 쓰다듬는 것을 허락하는데, 나도 인정받았다는 느낌이 들어 감격스러웠다.
"장 카미유~~" "나비야" "냥이야" "어이" "야"
많은 이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은 만큼 카미유는 이름도 여럿이었다. 이름 지어주는 이, 멀리서 바라만 보는 이, 가까이서 쓰다듬어주는 이, 귀여워는 하나 어지 할 바를 몰라 지푸라기로 꾹꾹 찔러보는 이, 그래도 이 모든 이의 마음은 비슷하나 보다. 불청객 고양이 한 마리가 결국은 우리 식구가 됐고,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줬다.
고양이 한 마리의 발짓이 나를 웃게 하고
고양이 한 마리의 울음소리가 나를 걱정케 하고
고양이 한 마리의 권태로운 표정이 내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탁한 회색 담장이 삭막함을 상징한다면 고양이는 따뜻함을 나타내고, 담장이 구속성을 띈다면 고양이는 자유로움이다. 매일 회색 담장을 보고 근무하는 내게 마음속 한 구석에 삭막함과 구속이 자리 잡고 있다면 고양이는 그것으로부터 해방시키는 탈출구다. 수용자에게 반려동물을 기르게 해 주면 어떨까 하는 판타지적인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