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약사, 화학자, 가내수공업자
보안과 야근부에서 근무했을 때 일이다. 나는 당시 야간 사동 배치를 맡아 순찰을 돌고 있었다. 야간이나 주말에 사동 근무를 맡으면 사고방지를 위해 최소 한 시간에 한 번 이상 순찰을 돌아야 한다. '또각또각' 걸음소리, 근무화의 굽과 수용동 바닥이 만나 생기는 이 마찰음은 수용자들에게 내 위치를 가늠하게 해주는 역할을 했다. '샤샤샥' 내가 9방쯤 지나칠 때 11방쯤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났다. 11방에서 멈췄을 때 수용자들은 각자 위치에서 딴청을 피우며 태평한 표정을 지으려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다. 어색했다. 대충 풀어져 있으면 의심이라도 덜 할 텐데 이불과 관물대는 정사각형을 보듯 각져 반듯했고, 수용자는 옷매무새를 가지런히 해 정자세로 앉아 있었다. '나 이거야 원 참' 물증이 너무 완벽하게 없으니 오히려 의심이 생겼다. 일단 지켜보자는 마음으로 지나갔다. 역시나 13방쯤 지나니까 다시 샤샤샥 거리며 부산한 소리가 들렸다. 한 시간 후에 순찰 때는 8방쯤에서부터 다시 샤샤샥 소리가 들렸다. 11방에는 한 시간 전에 봤던 모습의 정지 화면인가 싶은 광경이 펼쳐졌다. 수용자들은 눈만 깜빡거릴 뿐 아무런 말도 없었다.
'뭔가 있다'
'티가나도 너무 난다'
날 위한 깜짝 파티 같은 류는 절대 아닐 것이고,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기에 '샤샤샥 샤샤샥' 거리는 걸까. 궁금함과 동시에 문제가 될 만한 행동들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불안감으로 그 방을 급습할 계획을 세웠다. 수용자 거실에서 수용동 복도를 바라보는 시야가 상당히 제한되지만 보일 건 다 보인다. 그래서 낮은 포복을 한다한들 수용자들의 시선을 피할 수없다. -이것은 복도에서 거실을 바라봐도 마찬 가지긴 하다.- 그래서 낮은 포복으로 조심스레 걸어가 급습하는 건 애초에 포기해야 한다. 각 거실을 지나칠 때마다 웃음거리게 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수용동 순찰하는 시간과 순서를 달리하고, 동선을 계산 해 뒤에 거실부터 순찰을 해서 급습할까 고민했다. 곰곰이 생각하다, 생각하는 것도 귀찮아 5방쯤에서부터 그냥 냅다 달렸다. 도주하는 수용자를 잡는 거처럼 전력질주를 했다.
수용자들은 미처 놀랄 틈도 없이, 사태 파악도 아직 하지 못 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수용자들의 반응을 살필 겨를도 없이 모포 위에 어지러이 널려있는 한국화 그림들이 보였다.
'화투?'
'??????'
'!!!!!'
-0000번 수용자 그거 이리 주세요.
-부장님! 한 번만 봐주십시오. 저희가 버리겠습니다.
-가져오세요! 지금 안 주면 지시 불이행으로 스티커도 끊겠습니다.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오갔다. 화투가 어떻게 들어왔을까. 도서 우송품(택배로 들어오는 도서)이 들어올 때 딸려 들어왔으려나. 자비 구매 도서(영치품으로 구입하는 도서) 부록을 도서 담당자가 실수로 반입했으려나.
직원들 실수가 아니길 바라며 화투장을 건네받았다.
'음??????'
구부러진다. 구부러져도 너무 쉽게 구부려진다. 빨간색 플라스틱 화투장이 이렇게 쉽게 구부러져도 되나 싶어 재차 확인했다. 뭔가 어색하고 조잡했다.
'아............ 그렸구나.....'
이 걸 그렸구나... 너무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왔다. 똑같이 그린 것도, 화투장 하나하나 다 기억하는 것도, 무엇보다 한정된 필기구로 이런 디테일한 색감을 표현한 것도 너무 신기했다. "밖에서 화가였어요?" 전공은커녕 배워본 적도 없다고 한다. 길만 제대로 들어섰다면, 그림으로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교도소에는 희한한 재능이 있는 수용자들이 많다. 시간은 많고 자원은 한정적이니 여러 방법으로 원하는 것을 시도하고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이 징역 레시피로 전해진다. 뜨거운 물이 없어도 사이다와 고추장, 매실차로 비빔면을 만든다. 밥과 요구르트를 이용해 막걸리를 만든고, 얼굴에 바르는 스킨을 이용해 증류주를 만든다. 또 특정 감기약을 이용해 약기운이 느낄 수 있는 약도 제조하기도 한다고 한다. 수용자 거실을 들여다보라 관물대 구획을 나누기 위해 조그마한 종이상자 하나라도 허투루 쓰는 법이 없다. 화가이자 화학자요, 약사이자 가내수공업자이다. (막걸리, 스킨 술, 약 제조는 선배들에게 들은 이야기로 실제 체험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런 행위는 모두 절대 금지된 행위로 혹여나 적발될 시 징벌을 면할 수 없다.)
아침에 출근하려는데 양말에 구멍이 나 있었다. 빨래통에 꼬질꼬질한 양말이 수두룩 할 뿐 수납장은 텅텅 비어 있었다. 시계를 보니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어 직접 바느질을 하려 했다. 언제가 마지막이었을까. 군대에서나 해봤지 사회에서는 해 본 기억이 없다. 바늘귀에 실을 꿰는 것부터 너무 어색해 결국 포기했다. 구멍 난 양말로 출근했고 하루 종일 신발을 벗지 않았다. 퇴근 후 나는 바느질을 시도하지 않았다. 마트에 들러 새양말을 사고 내일을 대비했다. 바느질을 발전시키지 않은 것이다.
나는 재능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 퇴화해 가는 것일까.
가끔은 내가 잘 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