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초작성일 : 2026.1.23.
작년 초 부서를 옮긴 이후, 필자는 새로 합류한 부서의 부장을 자연스레 관찰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일상은 지금까지도 쉽게 해석되지 않는 하나의 풍경으로 남아 있다. 그는 부장급 중에서도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기에 조직에 대한 헌신이 미덕인 구세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점심시간을 거르면서까지 일하는 날이 적지 않았고 야근 역시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일상의 일부처럼 받아들이는 인물이었다. 그는 "일이 재미있다"고 말하다가도 이내 "일 하기 싫은 건 다 똑같다"며 모순된 속내를 내비친다. 그의 삶이 진정 행복을 위한 선택인지, 혹은 멈출 수 없는 관성의 결과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효율과 삶의 만족을 중시하는 필자의 시선으로는 그의 태도가 여전히 해석되지 않는 의문으로 남을 뿐이다.
인류의 역사는 생존의 역사였고, 그 생존은 언제나 선택의 결과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신체적으로 더 강하고 거칠었던 네안데르탈인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연약했던 호모 사피엔스가 살아남았다는 점이다. 유발 하라리와 같은 석학들이 지적하듯, 그 치열한 사투의 중심에서 사피엔스가 택한 생존 전략은 '호혜적 이타주의'였다. 이는 선의라기보다 역할의 분화와 상호의존을 전제로 한 생존 방식이었고, 공동체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각자가 자신의 몫을 끝까지 감당해야 한다는 암묵적 규칙을 만들어냈다. 누군가의 나태함은 곧 공동체 전체의 죽음을 의미했기에, 각자의 역할을 완수하는 책임 의식은 인류를 원시 시대에서 현대 문명까지 이르게 한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었다.
이처럼 이 협력의 구조는 오랜 시간 조직과 사회를 지탱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은 또 다른 전환점에 서 있다. 생존 그 자체보다 삶의 만족, 정서적 안정, 지속 가능한 일상을 더 중요한 가치로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 변화 속에서 회사라는 조직에 등장한 새로운 인물들이 바로 '영리한 이기주의자'들이다.
이러한 신인류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존재들이 아니다. 이들은 조직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으나 끝내 소외되었던 아버지 세대의 실패를 목격하며 자라났다. 이 신인류 노동자들은 직함과 자아를 밀착시키며 자신을 조직에 소모시키는 삶에 거리를 둔다. 임원이라는 지위가 곧 정체성이 되는, 이른바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에 나오는 구세대의 공식을 자연스럽게 의심한다. 조직에 쏟을 에너지를 아껴 자신의 내면을 돌보고, 훗날 떠올리고 싶은 나만의 추억을 만드는 데 몰두하며, 회사 밖에서도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는 생존력을 기르는 데 집중한다. 이는 분명 합리적이고 시대적인 선택이다. 다만 그 영리함은 언제든 다른 얼굴로 변할 수 있다. 자칫하면 무임승차자로 변모하여 타인에게 심각한 피해를 끼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영리한 이기주의자'들에게는 스스로에게 더 높은 도덕적 기준이 요구된다.
조직은 암묵적으로 '협력'과 '배신' 사이에서 선택을 내려야 하는 '게임 이론(Game Theory)'의 모델 위에 서 있다. 만약 모두가 책임을 회피하면 조직은 순식간에 붕괴한다. 반대로 일부만 협력을 선택할 경우, 그들의 에너지는 배신을 선택한 무임승차자들에게 고스란히 착취당한다. 이 지점에서 '영리함'은 쉽게 '기생'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마감 직전까지 판단을 미루다 교묘하게 업무를 떠넘기고, 문제가 생기면 마치 자신의 실수가 아닌 양 연기하며 책임을 회피한다. 그러면서도 사내 권력을 쥔 이들에게 유독 굽신거리며 본인의 무능을 가릴 보호막을 찾는다. 심지어 서비스 장애라는 긴박한 상황 앞에서도 태연한 태도를 보이며 스스로의 불안을 거짓된 여유로 위장한다. 본인의 안위와 불안에 매몰되어 동료를 약탈하면서도, 어처구니없게도 조직 내에서의 승진과 인정만큼은 누구보다 갈망한다.
이러한 무책임의 피해는 동료의 삶에 아주 구체적인 상흔을 남긴다. 누군가는 타인의 무능을 수습하느라 업무를 떠안고, 지친 얼굴로 집에 돌아가 정작 가장 소중한 가족들에게 친절할 여력을 잃어버린다. 한 사람의 무임승차는 조직 안에서 끝나지 않고 타인의 일상과 소중한 관계를 잠식해버린다. 그럼에도 조직의 관리자들은 종종 이들을 '순진한 사람' 혹은 '악의 없는 사람'으로 치부하며 방치한다. 갈등을 피하기 위해 그들을 '깍두기'처럼 여기고 넘어가는 순간, 그 공백을 채워야 하는 나머지 인원들에게는 부당한 짐과 분노가 전가된다. 게다가 한번 채용하면 해고가 어려운 경직된 제도는 이 기생적 존재들의 무책임을 보호하는 방패가 된다.
영화 〈인턴〉 속 '벤'(로버트 드 니로)을 보면 완성된 고귀함이 보인다. 이는 매사에 서툴고 감정 과잉 상태인 젊은 여주인공 '줄스'의 위태로운 열정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필자가 함께 일하는 부장의 현재가 '벤'과 같은 완성된 품격에 당장 닿아 있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벤'과 같은 고귀함은 오직 부장처럼 자신을 던져 일해본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헌신의 흔적'이라는 점이다. 묵묵히 제 몫의 책임을 넘어선 헌신을 해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그 흔적은, 타인의 에너지를 전제로 한 '영리한 이기주의자'나 '무임승차자'들은 결코 지닐 수 없는 영역이다. 만약 필자가 사장이라면 '영리한 이기주의자'보다는 필자의 부장과 같은 사람으로만 조직을 채울 것이라는 점에서, '영리한 이기주의자'야말로 해고가 쉽지 않은 현재의 시스템과 부장과 같은 이들에게 가장 감사해야 할 존재일 수 있다.
따라서 조직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균형 잡힌 삶을 추구하기로 선택한 ‘영리한 이기주의자’들은 늘 유념해야 한다. 나의 선택이 혹시 누군가의 노동 위에 얹혀 있지는 않은지, 합리라는 이름 아래 염치없는 기생으로 변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는 일 말이다. ‘영리한 이기주의’는 타인의 시간을 약탈하지 않는 ‘1인분’의 책임 위에서만 정당성을 갖는다. 무능을 비난하기에 앞서, 내게 주어진 배역이 누군가의 희생 없이 수행되고 있는지 먼저 자문해야 한다. 필자의 부장과 같은 이들이 보여주는 ‘헌신의 품격’을 존중하는 태도, 그리고 타인의 삶을 잠식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삶을 지켜내는 선택. 그 팽팽한 균형 위에서만 영리한 이기주의자는 비로소 설 자리를 얻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