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영화 <햄넷>을 통해 느낀 질문

"우리는 왜 쓰는가?"

by 메타린치

영화 <햄넷(Hamnet, 2025)>은 아들을 잃은 셰익스피어 부부의 상실과 그 치유의 과정을 다룬다. 자식을 잃은 참혹한 고통 앞에서 부부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슬픔을 견디고 승화시킨다. 아내 아네스가 상실을 온 몸으로 감각하며 버티는 반면, 남편 윌리엄은 그 고통을 문장으로 옮겨 무대 위로 올리는 길을 택한다.


이처럼 이 영화는 상실 그 자체의 무게와, 고통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발현하는 남겨진 자들의 서로 다른 풍경을 비추는 데 집중한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소설 창작'에 도달하고 싶다는 개인적인 열망 속에서 이 영화를 보았을 때, 전혀 다른 결의 사유가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이는 영화가 던진 질문이라기보다, 필자가 이 영화를 통해 떠올리게 된 질문에 가깝다. 우리는 왜, 끝내 쓰기를 멈추지 못하는가.


영화 속의 윌리엄처럼 작가는 때때로 대단히 취약한 지점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행위인 동시에, 역설적으로 그 취약함을 둘러싸는 가장 견고한 성벽을 세우는 과정이 되어주기도 한다. 고통은 날것 그대로일 때 우리를 파괴하지만, 문장으로 배열되는 순간 다룰 수 있는 대상이 된다. 특히 시나리오 집필은 상처를 은폐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으로부터 안전한 거리를 확보하는 독특한 기술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종종 이름 없는 개인으로서 내 목소리가 세상에 닿을 자격이 있는지를 의심하고, 영향력 없는 이의 고백은 광장의 공허한 메아리가 될 뿐이라는 두려움에 대개 침묵을 선택한다. 그러나 서사는 그 불안을 우회한다. '인물'이라는 페르소나를 통해 우리는 자신을 직접 노출하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더 깊은 내면에 도달할 수 있다.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가 <예술가로서의 비평가(The Critic as Artist, 1891)>에서 말했듯, 인간은 가면을 쓸 때 비로소 진실해진다. 소설 속 인물은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작가가 현실에서 표현하기 어려운 내면의 질서를 발화하기 위해 빌려 쓰는 정교한 매개체인 셈이다.


이러한 글쓰기의 과정은 '표출'을 넘어 ‘정리’의 과정이기도 하다.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던 상념들은 문장이라는 형식을 부여받는 순간 인과를 획득한다. 물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 내면의 격동은 일종의 고엔트로피 상태와 같다. 방향성 없이 흩어진 에너지는 ‘계(界, System)’를 파괴하려 들지만, 글쓰기는 이 무질서한 감정의 파편을 '문단'이라는 상수로 구조화하고 저엔트로피 상태로 재배열한다. 따라서 생각을 문장으로 배열하는 것은 에너지를 가두어 제어할 수 있는 '안정적인 궤도'를 형성하는 일종의 정서적 건축이다. 그 때문인지 필자 역시 무엇을 먼저 이해해서 쓴다기보다, 쓰는 과정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한 경험이 있다.


윌리엄은 무대 위의 ‘햄릿’을 통해 현실에서는 영원히 단절된 아들 ‘햄넷‘과의 관계를 다시 지속시킨다. 이 장면은 글쓰기를 넘어 '예술'이 가진 가장 본질적인 기능을 압축한다. 예술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견딜 수 있는 형태로 변환한다. 그렇게 변환된 감정은 타인에게 전달되고, ‘공감’을 통해 보편적 가치로 확장된다. 그렇기에 이 영화가 남기는 여운은 단순한 상실의 슬픔에 머물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현실의 어떤 벽 앞에서 말을 멈춘 적이 있다면, 혹은 끝내 전하지 못한 생각을 품고 있다면, 예술은 그것을 대신 전해줄 수 있는 통로가 된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넌지시 일깨운다. 이때의 심미적 행위는 타인을 향한 '자기 과시'가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한 ‘자기 보존’의 성벽 쌓기에 가깝다. 우리는 그 성벽 안에서 비로소 조금 더 정확한 방식으로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어쩌면 글쓰기는 가장 낮은 문턱의 예술이기에, 우리는 쓰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끝내 자유로울 수 없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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