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을 잠재우는 글쓰기 한번
유투브 여행 채널을 보다가 자정을 넘겼다. 2020년 2월23일 피렌체에서 투어를 마치고 베네치아로 돌아오는 기차안에서 코로나 전염병에 대한 우려가 심각하다는 기사를 보고 곧 도시를 봉쇄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느꼈던 비현실감으로 2년을 살았다.
이제 사람들은 코로나를 더이상 낯설어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그렇게 익숙한 전염병, 치명률이 현저히 낮아졌다는 사실로 코로나와의 공존에 적응하기로 한 모양이다. 그리고, 가장 먼저 초토화되었던 여행이 곧 재개되리라는 설레임으로 여행사들이 2년간 묵힌 먼지를 털고 문을 열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한 여행사 오픈을 알리는 채널을 지켜보다가 자정을 넘겼다.
그리고 살짝 꾸벅이던 잠도 달아난 지금, 오랫만에 책상에 앉아 마감일따위 없는 글쓰기를 한다.
글쓰기라고 하기엔 오랫만에 쓰는 일기같은 것이지만.
브런치가 생각났다.
제각각의 이유로 잠 못 드는 밤이 있겠지만, 나는 왜 오늘 밤 잠 못들고 있을까.
내가 저 유투브 채널의 현장에 있었으니 동료들의 설레임을 공감하기 때문은 아니다.
나는 혼자 걸어온 인생 2막을 코로나 시즌동안 정리했다.
공간을 옮겨 이제 다시 한국, 인생 2막을 마감하는 동시에 3막의 문을 여는 시그널, 나의 책 출간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책 한권을 남기고 이 생을 마감할 수 있다니.. 그 책이 그래도 부끄럽지 않게 쓰여서 사람들이 빙그레 웃으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이 된다면, 내 인생은 행운인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뭔가를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지만, 그 치열함이 한가지 주제로 책으로 남는 것은 행운에 가깝다. 글을 쓰는 것은 내 머리에 저장된 자료들만 꺼내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몰랐던 나의 생각 습관들이 동시에 쏟아져 나오는 것이라 가장 당황스러운 건 자신이다.
내가 쓰는 문장들이 다시 읽어보니 꽤 좋은 방향을 가진 생각이어서 놀라기도 하고, 뒷마당에 널부러져 있는 쓰레기 더미처럼 의미도 감정도 없는 빈껍질같은 말의 나열이기도 해서 당황스럽기도 하다.
글쓰기는 자신을 들키는 일인 것 같다. 문장의 유려함은 말의 포장지다. 포장지가 멋지면 첫 인상이 좋아 보이지만, 결국 글을 읽으면 누구나 자신의 내면이 유리처럼 드러나 버린다. 글을 쓰면서 내가 느낀 것은 내가 촌스러운 생각을 가지면 글도 책도 촌스러운 면장을 못 벗어난다는 것이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내 생각의 촌스러움과 유치함을 적잖이 마주하고 멈칫했다.
'너 생각이 이렇게 낡았었니?'
글을 계속 써야하니, 나는 내 낡고 촌스러운 생각을 다듬어야 했다. 모두 버리면 쓰게 없으니까. 최대한 나의 생각을 이해하고 그 중 가장 괜찮은 녀석들을 골라내야 했다. 그래서 침묵하고 머릿속 생각들을 다시 들어봐야했다. 그럴 때 내 안의 생각에 경청하고 음미하고 공감하는 생각들이 있었다. 글쓰기를 하면서 나는 경청하는 방법을 배운 것 같다.
1년 묵은 콩자루에서 그나마 쓸만한 콩 쪼가리들을 골라내는 일을 하다보면, 콩 모양을 자세히 보게 된다. 노란 콩은 동그랗지 않고 살짝 타원형이다. 가운데 얇은 줄이 그어져 있고 씨눈도 한쪽 중앙에 박혀 있다. 시간이 지나면 콩도 쪼그라든다. 쪼그라들지만 살짝 말랑한 기가 있는 것들은 아직 수분이 마른 것이 아니기에 먹을만 한 것들이다. 콩자루에서 묵은 콩을 골라내는 일은 단순한 일이 아니라 콩을 제대로 만나는 성스런 일이다. 글을 쓰다 보니, 나는 내 생각의 방향을 만나게 되었다. 다행히 아직 수분이 마르지 않은 생각들이 몇가지 있어서 글쓰는 재료로 쓸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촌스럽고 낡았다. 나는 과거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료의 신선함, 자료의 양, 자료의 무게에만 가치를 두었기 때문이다.
겨우 골라낸 나의 묵은 콩들이 콩밥이 되어 책으로 나온다. 기적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