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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믕됴 Jun 28. 2023

회피형 남자의 철벽을 박살낸 말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냉소를 현실적인 태도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로맨스를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냉소는 현실적인 태도가 아니다. 자신의 시각에서 바라본 상황이나 대상을 실제로 보이는 것보다 아주 약간 비관적으로 비뚜름하게 평가하며 기대치를 낮추는 일종의 방어다. 로맨스를 믿지 않는다는 말 역시 어쩌면 방어일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 예비신랑을 만나기 전까지 로맨스를 믿지 않았던 것처럼.


나는 예랑이를 만나기 전 메세지를 주고 받는 시기에 이미 내가 회피형이라는 걸 이야기했다. 고백하자면 그땐 갑작스레 한동안 연락이 잘 안 될 수도 있다는 말을 돌려서 표현한 거였다. 그게 내가 생각하기에 연애를 망쳐놓을 수도 있는 나의 특성 중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미리 경고등을 켜 뒀다. 예랑이는 회피형이 뭐냐고 되물었다. 그게 뭔지 설명하고 나니, 예랑이는 자신도 회피형인 것 같다고 했다. 나중에 검사를 해보니 실제로 극심한 회피형이기도 했다. 그런데 예랑이 메시지를 봤던 그 때는 그 말에 뭔가 숨겨진 뜻이 있을 거라고 받아들였던 기억이 난다. 내가 '회피형'이라는 말 뒤에 무언가를 숨겼듯이 말이다.


하지만 예랑이는 조심스러운 사람이긴 해도 비겁한 사람은 아니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말로도, 표정과 눈빛으로도, 연애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부터 지금까지도, 관계에 확신을 가지기 어려운 성향을 지닌 나조차 절대 헷갈릴 수 없을 만큼 또렷한 색깔의 단서를 마구 뿌렸다. 나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주워모으면서 매번 고맙다고 말했다. 그의 성향을 알기 때문에 나는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렇게나 선명한 색깔을 내려고 얼마나 많은 감정을 들이부어야 했을지 나는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하얀 팔레트에 감정을 짜서 빨갛고 파랗게 칠하고 서로 주고받는 다른 이들과 달리 우리에겐 수돗물로 가득찬 물통만 있다. 무슨 색 물감을 얼마나 짜서 넣든 붓에 적셔 종이에 옮겨보면 색깔이 희석되어 아주 투명하게 종이에 옮겨진다. 당황하며 황급히 겹쳐 칠해도 색깔은 시원찮고 종이는 망가져버린다.


맨날 팔불출같은 소리만 능청스레 늘어놓는 예랑이에게 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너도 참 큰일이야." 예랑이는 개의치않고 '큰일'날 소리를 더 많이, 더 열심히 한다. 그래서 너는 어쩜 그렇게 선명하냐고 연애 초기에 물어본 적도 있다. 그런데 예랑이의 대답은 그때의 내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내가 '고맙다'고 하기 때문이란다.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닭에게는 달걀이 먼저고, 달걀에게는 닭이 먼저다. 고맙다는 말은 그가 보여주는 마음에 들이는 노력이 어느만큼인지 잘 알기에 한 것인데, 그는 내가 고맙다고 했기 때문에 안심하고 내게 마음을 다 보여준단다. 나는 그가 보여주는 마음이 너무나 선명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에 내 마음도 보여주는 것인데, 그는 내가 먼저 투명하게 모두 보여주었다고 한다.


나는 현실에 로맨스란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 한 쪽에게도 기울지 않고 균형적이어서 누구도 박탈감을 느끼지 않고 서로의 존재만으로 원동력을 얻는 따뜻한 관계는 아주 조심스럽게 설계한 배경 속의 아주 잘 짜여진 두 캐릭터 사이에만 픽션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아주 현실적인 줄 알았다. 지금 보면 둘 중 하나다. 내가 지금 1년이 넘도록 망상증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거나, 내가 나도 모르게 꽤나 오랫동안 냉소적으로 살다가 마침내 현실을 만났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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