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해지려면, 아님 적어도 평범함이 괴롭지 않으려면
2021.09.25
'Give And Take'(Adam Grant 저)는 워낙 인상 깊게 읽은 책이라 두 번째 리뷰를 쓴다.
이번 리뷰는 오랫동안 나를 혼란스럽게 했던, 그리고 이 책과 'Grit'(Angela Duckworth 저)을 읽고 비로소 해석하는 방법을 찾은 영화 '위플래시(Whiplash, 2014)'와 연결 지어 작성해 보려 한다. (독자가 이 영화를 보았다고 가정하고, 줄거리 등은 생략했다.)
Mediocrity. 평범함.
모두가 인정하기 싫어하지만 대부분이 마주하는 한계다. 모든 사람은 본인이 비범한 꼬리이기를 바라지만 대부분은 정규분포의 거대한 종을 빽빽하게 메우며 고만고만해서 서로 구별도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위플래시의 플레쳐 교수는 이에 대해 그것은 네가 안주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일침을 날린다.
그러고서 그의 성공 공식을 보여준다. 재능은 기본이고, 투지. 죽으라면 정말 죽을 수도 있을 정도의 투지.
드럼을 제외한 주인공 앤드류의 모든 것 - 그의 청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와 그의 인격 - 이 시들어가는 모습과 그저 고통스러워 보이기만 하는 드럼 연습 장면을 보면 성공을 가능케 하는 투지는 이토록 극단적이어야만 하는가 싶다가도, 플레쳐 교수의 위상과 그의 논리에 설득당한다. 뭔가 이건 아닌데, 싶지만 딱 짚어 반박하기가 어렵다.
찝찝했다. 내가 평범한 이유는 노오-력이 부족했기 때문만일까. 목숨을 불사하고, 다른 모든 것들을 포기해야 할 정도의 각오가 없으면 영영 낙오자로 남는 것밖에 방도가 없을까. 가르치는 자는 어느 정도까지 헌신적인 투지를 끌어내야 하는가. 이렇게 흑백으로만 이 영화를 해석하는 것이 맞는가. 두세 번 영화를 다시 봐도 답을 찾지 못해 몇 년 동안 머릿속에 떠돌았던 질문이다.
그러다 <Give and Take> 책에서 Giver들이 재능을 알아보고, 기르는 방식에 대한 부분을 읽다 플레쳐의 교수 방식에 문제를 찾았다. 그의 인격모독과 폭력성도 당연히 문제였지만, 이는 오히려 주변적이었다.
그는 학생에게 동기부여를 하지 않았다. 하기는 하지만, 그의 방식은 학생이 드럼을 시작하게 된 이유와 관계가 없었다. 플레쳐는 본인의 이상향('예술 그 자체로서의 순수한 아름다움'), 더 나아가 본인의 명예를 달성해줄 수 있는 매개를 필요로 할 뿐이었고, 그걸 수행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상관이 없었다. 그가 극한까지 내몰며 가르쳤던 한 재능 있는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플레쳐 교수가 흘린 눈물은 그 사람을 잃은 것이 아니라, 그 음악의 연주자를 잃었다는 슬픔을 향한 것이었다.
플레처 교수는 학생들이 가진 각기 다른 열정과 그 배경이 되었던 감정, 사연 따위는 깡끄리 무시하고 본인의 목표를 투사했다. 그에게 재즈란, 그리고 재즈 뮤지션이란 어떤 절댓값으로 존재했고 자기(self)를 잃어서라도 그 경지에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을 찾고, 그가 원하는 모습이 될 때까지 가스라이팅했다. 재즈는 연주자의 표현의 자유도를 열어두는 장르이기에 플레쳐가 취하는 교수방법이 얼마나 모순적인지 더욱 여실히 드러난다.
<Give and Take>와 <Grit>에 의하면 성공은 재능, 동기부여, 그릿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릿은 다시 또 열정과 끈기로 이루어져 있다. 동기부여와 열정은 곧 대상에 대한 애정이다. 대상에 대한 애정 없이 재능과 투지만으로는 탁월함을 달성할 수 있을지라도 지속가능하지 못하다. 플레쳐는 맹목적인 투지에만 불을 붙일 뿐, 그 과정에서 학생이 원래 갖고 있던 동기와 열정과의 연결을 상실하게 만드므로 실패한 지도자다.
처음 위플래시를 보고 심한 불편감을 느꼈던 것은 나 스스로 떳떳하지 못한 부분, 나 스스로 가장 못났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네가 그 정도밖에 못 되는 것은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 라는 플레쳐 교수의 메시지는 마치 나를 향한 일갈 같았다. 하지만 '뭐든' - 특히 내가 대단히 원치도 않는 것이라면 더더욱 - '막연히' 열심히 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무작정 몰아붙이는 리더나 선생님이 있다면, 그들의 의도를 의심해봐야 한다는 것을 두 권의 책을 읽으며 느꼈다.
'내가 그것을 원하는 줄 알았는데, 열심히 하게 되지 않는 걸 보니 아닌가 보더라' 하는 식의 생각은, 끈기 반, 열정 반으로 이루어진 '그릿'의 부족함을 열정 부족으로 축소하는 것이기에 비약이 있다. 내가 스스로를 그렇게 위안한 적이 많기에 이것이 변명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Grit>에서도 '열정은 계시처럼 오지 않는다'라고 한다. 관심사는 성찰만으로 확인할 수 없어 실험해봐야 하고, 생긴 이후에도 꾸준히 주도적으로 개발해 나가야 열정이 생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반대로, 열정 자체도 쉽게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끈기만큼이나 중요한 구성요소임을 시사한다. 뭔가에 대해 좋은 감정, 좋은 기억 따위의 작은 마음이라도 있으면 충분한 열정을 갖췄다고 착각하고, 나머지는 끈기와 재능만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면 부족한 체력에, 비교해보면 턱없이 부족한 재능에 좌절하기 쉽다. 특별히 뛰어나 지지 못하는 데에는 부족한 끈기만큼이나 부족한 열정도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사실 그리고 이 세상에 뛰어난 사람은 결국 한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뛰어난 사람까지는 되지 못하더라도, 열정이 있는 것을 한다면 포기할 이유가 없다.
그럼 위플래시는 희극인가 비극인가? 이 또한 몇 년간 결론짓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내린 결론은, 앤드류가 드럼을 여전히 사랑하고, 이제는 단련된 투지로 계속할 본인의 방법과 의지를 찾았다면 희극이라는 것이다.
맹목적인 투지와 재능에만 매몰되어 평범함을 괴로워하는 비극보다, 열정을 들여다보고, 열정을 들여다보게 해 주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희극을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