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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십오에서이십육 Sep 17. 2021

소개팅 철학

커피 한잔할래요?

2021.05.14.


아침 일찍 카페를 와서 조용히 커피를 즐기다, 커피잔이 비워지면서 공간에 사람과 소리가 차 오르는 기분을 좋아한다. 가끔 귓가에 흘러들어온 이야기가 재밌으면 더 좋다. 오늘은 어떤 남자가 그의 여자 사람 친구에게 소개팅에 나오는 여자가 지켜야 할 에티켓에 대한 본인의 철학을 설파하고 있다.

1. 단정한 옷차림을 입고 나와라. 처음 보는 자리이지 않은가. 아무리 본인 몸매나 스타일에 대한 자신이 있어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예의를 갖춰야 하므로 안전하게 단정한 차림으로 입고, 상대방이 준비가 된 것 같으면 두 번째 이후 만남에서부터 스타일을 조금씩 보여줘도 좋다.
2. 남자가 밥값을 계산하는 건 당신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그게 관행이라서 그런 것이니, 그에 상응하는 매너를 갖춰라. 상대방이 계산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나, 일부러 비싼 음식을 고르는 것은 금물이다.
3. 얼빠여도, 얼빠인 티를 내지 말아라.
4. 소개팅을 많이 받아 봤어도, 많이 받아본 티를 내지 말아라.
5. 소개팅에서 하는 대화는 당신의 깊이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남자가 논리를 전개해 감에 따라 여자는 불편함에 꼼지락거린다. 그가 나열하는 까다로운 조건들에 다음 소개팅에는 얼마나 더 많은 자기 검열을 거쳐야 하는 것인지, 이게 일반적인 남자의 생각인지를 걱정하는 것 같다. 여자는 내 평소 옷차림에 대해서는 대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던 거냐며 쏘아붙이고, 남자는 너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니까~하면서 얼버무린다.


사정을 (엿)들어보니 남자는 쌍방이 서로를 별로 마음에 안 들어했던 최근의 소개팅의 실패에 대해 무언가의 명목을 부여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이건 내가 매력이 없어서도 아니고, 상대방을 이런저런 잣대로 판단하는 내가 속이 좁아서도 아니고, 소개팅에는 '으레 지켜야 할 에티켓'이 있는데 그녀가 그걸 지키지 않아서야. 그가 주장하는 '에티켓'이 얼마나 공감된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소개팅이 망한 데에는 위 요소들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긴 했을 거다. 하지만 나는 그게 핵심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도 소개팅에 대한 철학이 있다. 하나는 망하는 게 기본값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될 거면 처음부터 되고 안 될 거면 안 될 거라 복잡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여기서 '된다'는 것은 애프터 따위가 아니라 연인으로 발전하는 것을 의미한다(애프터도 누군가에겐 '에티켓'에 불과할 수 있기에).

1. 소개팅은 무조건 망한다
'소개팅이라서' 망한다라기보다 여느 일반적인 만남이 연인으로 발전할 확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회사에서, 모임에서 만나는 아무개와 바로 사랑에 빠지지 않듯, 또 하나의 샘플링일 뿐인 주선자의 매칭이라고 해서 더 잘 될 유인이 없다. 일상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소개팅 성공률이 높다'라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금사빠'가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 그런 사람은 멍석만 깔아주면 아무나 만날 수 있는 게 아닌가? (그게 꼭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아마 배려심이 넘쳐 상대방에게 잘 맞춰주는 타입일 것이다. 그냥 내가 그렇지 못하다는 것뿐.)
2. 될 거면 바로 안다
말콤 글래드웰의 '블링크'에서는 우리가 내리는 많은 판단들은 논리보다 어떤 본능적인 기제에 의해 눈치챌 새 없이 빠르게 진행된다고 시사한다. 콜롬비아대에서 진행한 실험에 따르면, 사람들에게 본인이 좋아하는 스타일을 설명하게 했을 때의 묘사와 실제로 스피드 데이팅을 하면서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들은 상당히 차이가 났다고 한다. 상대와 짧은 인사 정도나 주고받을 수 있는 6분 만에, 알 수 없는 메커니즘이 머리로 생각하는 이상형과는 딴판의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기억을 되짚어 보면 나의 옛사랑도, 주변에 결혼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걔랑 그렇게 될 줄 몰랐어/전혀 내 스타일이 아니었거든'로 시작하는 레퍼토리 일색이다.
한 친구의 기막힌 철학을 빌리자면 연애는 '자장면 아니면 짬뽕' 시나리오라는 거다. 너 자장면 먹을래, 짬뽕 먹을래?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바로 머리를 스치는 것이 정답이고(번복하면 꼭 후회한다), 로맨스의 또 하나의 유명한 명제인 '사랑은 타이밍'과도 기묘하게 맞아떨어지는데- 오늘은 그 정답이 자장면일 수 있지만 내일은 짬뽕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소개팅에서의 성공 여부는 초장부터 이미 각이 선다. 그 이후에 얼마나 가느냐는 다른 문제겠지만, 적어도 초기의 점화는 첫 몇 분 내에 결정되고 남은 시간은 그냥 그걸 굳히는 시간이다.

우리의 소개팅 에티켓 제창자 분은 아마도 초반에 별로라는 생각이 든 이후부터는 대충 대화에 참여는 하지만 내내 머릿속으로 이게 아닌 이유의 목록을 구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도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공들여 세운 원칙들이 떠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삶의 트랙에 대한 확신이 흐려지고 코로나로 누구든 만나는 게 어려워지는 요즘, 이렇게 1) 어차피 다 안된다 2) 기면 기고 아님 아니다라는 프레임이라도 있어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다. 요는, 희망을 갖자는 거다.


혼자 보는 전시를 보러 노트북을 덮고 자리를 뜬다. 옆자리에서 펼쳐진 대화에는 전혀 무지한 척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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