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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뫼르달 Apr 03. 2023

<장고, 벤야민, 그리고 따뜻한 우유>

 #비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에는 늘 따뜻한 우유를 마신다. 전자레인지를 이용한다면 꼭 10초씩 나누어 데울 것. 방충망에 맺힌 빗방울들을 괜히 손가락으로 닦아내어 보기도 하고. 귀에 꽂는 건 대개 장고 라인하르트. 경쾌한 스윙 너머로 들려오는 빗소리를 좋아한다. 재즈빗소리는 닮은 구석이 있다. 한없이 반복되는 테마 속 자유로운 변주. 차분한 마음으로 노트를 펼쳐 오래된 메모들을 읽어보기도 한다. 발터 벤야민 어쩌고저쩌고. 물기를 머금은, 여기저기 울어 눅눅해진 종이의 촉감이 좋아서. 물담배 연기처럼 짙은 구름이 드리운 하늘을 좋아한다. 어쩌면 무지개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기다리곤 한다. 비 오는 날을 보내는 나만의 방식이다.


발터 벤야민,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기적


 어쩌면 기적이란 반복되는 일상 속에 있는 건 아닐까. 매일 같이 새벽마다 미사를 드리는 친구를 보며 떠올린 생각이다. 발터 벤야민의 입을 빌려 말하자면, ‘한 번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만이 참된 의미를 지닌다. ‘나’를 찾아가는 과정 역시 그러할 것이다. 급격히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온전한 나를 찾는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니까. 그렇다고 유튜브나 구글의 알고리즘에게 내가 누군지 묻는 건 어불성설이다. 내가 누군지 말해줄 수 있는 건 나 자신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탐색의 과정은 ‘한 번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자신만의 취향, 방식, 규칙들을 ‘계속해서’ 확립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비가 오는 날에는 장고 라인하르트를 듣는다거나 졸린 몸을 이끌고 매일 같이 새벽 미사를 나가는, 그런 반복되는 사소함 속에 기적이 있음을 믿는다.


만개한 유채꽃, 온천천에서

 #화분


 할머니 댁에는 화분이 많았다. 마당부터 안방에 이르기까지 가지각색의 화분들이 있었는데, 하나하나 다른 주기와 방식으로 물을 줘야만 한다고 하셨다. 우리 집에서는 죽어가던 녀석들도 할머니의 손길을 타면 금세 생기를 되찾았다. 화초들도 다들 입맛이 달라. 잎이 두꺼운 고무나무 종류는 물을 조금씩 줘야 한단다. 간혹 ‘벤자민’처럼 고무나무 중에도 잎이 얇은 품종이 있지. 유럽식으로 발음하면 ‘벤야민’이네요. 식물을 기르는 일의 어려움을 알아갈수록 사람을 대하는 일에도 더욱 신중해졌다. 어쩌면 나 자신을 대할 때에도 말이다. 사람은 물과 햇살만으로 살아갈 수 없으니. 저마다 다른 향과 빛깔의 화분들을 보며 다짐했다.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세 손가락 기타리스트, 장고 라인하르트

 #스탠다드


 ‘스탠다드’라는 말을 썩 좋아하진 않았다. 왠지 꽉 막힌 따분한 단어 같았기 때문이다. 스탠다드란 뭘까? 남들과 같은 것, 평범한 것, 평균적인 것. 만약 그런 게 스탠다드라면 대체 무슨 의미일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에 불과했다. 나의 스탠다드는 곧 나만의 방식이니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먹고 싶은 음식을 먹고,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것. 그러면서도 다른 이들의 스탠다드를 존중하는 것.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찾아가는 과정은 곧 세상을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로 타인을 바라볼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나 자신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하는 중이다. 적당한 주기와 방식으로 내게 물을 주는 일 말이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에는 장고 라인하르트를 듣고 10초씩 나눠 데운 우유를 마시며 말간 하늘에 무지개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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