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는 삶에서 나아가는 삶으로
일을 하다가 건강이 나빠지고 성격도 바뀌었다. 여러 위험 징조들이 보여서 퇴사했다. 처음엔 당연히 이직할 곳을 알아보려고 했지만 지원하고 싶은 직무도 회사도 없었다. 아무 곳이나 지원해서 아무 일이나 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에 하나씩 무차별 지원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아니 보통 그랬었는데, 이상하게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번아웃이 세게 온 걸까? 연말까지는 쉬면서 다음에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했다.
퇴사 통보를 하고 바로 추석이 있었다. 무료한 시간을 보내다 직방앱을 켰다. 이미 오래전부터 작은 가게를 여는 것이 꿈이었기에 종종 들어가 시세를 확인해보곤 했다. 상상만 한 것도 벌써 5년이 넘은 것 같다. 작년 겨울쯤에 마음에 드는 곳이 있어 확인하러 갔었지만 임대료가 너무 비싸서 마음을 접었었다. 스크롤을 하던 중 집 근처에 가격이 괜찮은 상가 매물을 발견했다. 바로 다음날 아침에 매물을 확인하러 갔는데 실제로 보니 너무 작고 낙후된 곳이었다.
부동산은 역시 직접 와봐야 한다는 걸 깨닫고 그냥 집에 갈까 했지만 처음 와보는 동네여서 온 김에 주변을 구경했다. 우연히 초등학교 후문 바로 앞 한적한 골목의 빈티지 옷가게 앞을 지나게 됐고 창문에 임대 광고지가 붙여져 있는 것을 봤다. 기존 임차인의 전화번호였다. 전화해서 물어보니 조건이 괜찮았고 추석 다음 주에 가게를 연다고 해서 방문일자와 시간을 잡았다. 방문해서 가게 내부를 보니 작은 화장실도 있었고 마음에 들었다. 바로 그날 임대인에게 전화를 했고 그로부터 며칠 후에 계약 조건, 기간 등을 상의하고 가계약금을 넣었다.
불과 1-2주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직방에서 그 (실패한) 매물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뚜렷한 창업 계획이 전혀 없었다. 카트라이더 게임에서 부스터 아이템을 먹고 갑자기 질주하는 것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진 추진력으로 여기까지 왔다.
지나온 길이나 현재의 여건과 관계없는 ‘꼭 해보고 싶은 일‘에 대한 갈증이 항상 있었다. 작은 가게를 여는 건 나에게 그런 일이었다. 막연한 상상은 시간을 견뎌 점점 단단해졌다. 문득 생각이 날 때마다 아이패드에 내가 꿈꾸는 가게의 모습을 그렸고 가구는 어떻게 배치할지, 어떤 책과 음료를 팔지 꽤나 구체적으로 구상했다. 가게 이름도 머릿속에서 두 차례나 바꿨다.
상상을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던 이유는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부해야 할 때, 멈춰야 할 때, 회사를 다니며 여러 사람을 만나야 할 때. 언젠가 가게를 열게 되겠지만 높은 확률로 40대 혹은 은퇴 후가 되지 않을까 예감했었다. 모든 일이 그렇듯 자영업도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며 내가 알지 못하는 어려운 점이 많을 것이라는 당연한 짐작과 검증되지 않은 위험한 길은 쉽사리 택하지 않는 안정추구형 성격도 한 몫했다.
그래서 요즘의 내가 나도 낯설고 부담스럽다.
제일 힘든 건 어쩔 수 없이 주목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뒤에서 조용히 일하는 걸 좋아하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건 끔찍이 싫어하는 나인데 하고자 하는 일이 책방이니...결국 사업이고 자영업이니 내가 아니면 홍보를 할 사람이 없다.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고 심장이 빨리 뛴다. 사실 계약 과정부터가 위기였다. 기존 임차인과 임대인과 통화하는 일이 너무 스트레스였다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것 중 하나가 전화다).
본계약까지 마무리하고 2주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요 며칠간 나는 나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왜 사서 고생이냐 가만히 좀 있지. 괜한 객기 부리지 말고 하던 일이나 하지.
스스로에게 악담을 퍼부으며 조금 후회도 했다. 그러다 오랜 시간 혼자 고민했던 나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내가 지금 뭐 63빌딩 짓겠다는 것도 아닌데 뭐 이렇게까지 의심하고 불안해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불안을 잠재우니 내가 창업을 결심하게 된 진짜 이유가 보였다. 나는 번아웃이 온 게 아니라 재미없고 안 맞아도 그냥 버티는 삶에 질려버린 것이었다. 기회가 보이고 마음의 방향이 어쩔 수 없이 그곳으로 향할 때, 가만히 있는 것도 미련한 일이었다. 나는 조금이라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계약은 1년으로 했다. 12개월 후의 결론이 무엇일지 모르겠지만 일단 할 수 있는 만큼 해보기로 했다.
너무 기대하거나 무리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나는 가장 즐거운 일까지도 우울하게 생각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이건 분명 신나는 일이다.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