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웃지 않으면 표정근이 약해져서 얼굴이 더 울상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가. 무표정으로 있을 때 인상이 무서워 보인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웃상인 사람들이 부러웠다. 무표정으로 있어도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고 눈매가 반달 모양이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받을 일이 별로 없는 사람들.
반대로, 울상인 사람들에겐 웃상인 사람들에 비해 쉽게 호감이 가지 않았다. 가끔 인상이 정말 무서운 사람을 볼 때면 저 사람과는 절대 못 친해지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곤 했다.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 인종차별과 크게 다르지 않지 않을까. 미국에 온 첫 주에 워싱턴 DC 차이나타운을 혼자 구경하다가 다섯 명쯤 되는 흑인 남성 무리가 큰 소리를 질러 나를 놀라게 한 후 낄낄 거리며 지나갔던 일 이후로 흑인만 보면 악감정이 생겼다. 스스로를 지키려는 야만의 마음이었을 수도 있겠다. 마치 코로나19 초기 때 확진자를 대하던 국가와 사회의 태도처럼. 흑인에 대한 이유 없는 편견은 현재 직장에 취업하면서 깨뜨릴 수 있었다. 나에게 가장 잘해주는 상사 두 명 모두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 여성이다. 그들은 성실하고 동료들을 잘 챙기며 유머러스하다. 회사가 아닌 길에서 그들을 만났다면 나는 어떤 부끄러운 편견을 가졌을까.
인종에 대한 편견과 울상과 웃상을 가르는 편견은 어쩌면 같은 이야기.
성격 좋아 보인다, 인상 좋다는 말의 참뜻은 뭘까.
우울한 사람들이 좋다.
예전의 우울했던 내 모습과 화해했기 때문일까.
불편하게 느껴졌던 무표정한 얼굴과 어색한 몸짓이 이제는 사랑스럽게 보인다.
남들이 청춘이라 부르던 대학교 2학년. 총 수강 인원이 10명도 채 되지 않는 영어 스피킹 과목을 들었다. 2인 1조로 짝을 지어 스피킹 연습을 같이 하는 과제가 있었다. 짝은 랜덤으로 정해졌는데 공교롭게도 수강생 중 가장 외향적이고 밝아 보이던 선배와 짝을 이루게 됐다. 나는 기분이 좋았다. 가만히 있어도 말을 먼저 걸어주고 웃어주는 사람. 그런데 과제를 끝마치고 그 선배가 인사를 하며 남긴 말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있다. “너 맨날 그렇게 웅크리고 다니지 말고 고개 들고 가슴 좀 활짝 피고 걸어. 알았지?“
오늘도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는 울상들에게 하고 싶은 말. 우리가 대체로 부정적이고 쉽게 의기소침해졌던 이유는 어딘가 고장 났거나 날 때부터 불량품이었던 건 절대 아니라고. 그저 세상에 기대한 게 너무 많았기 때문이라고. 그토록 버리고 싶었던 예민함과 소심함은 사실은 너를 눈부시게 빛내고 있었다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