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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Nov 18. 2022

전시회를 마치고 아쉬운 것들

'SNS포스팅' 너머 '학예회' 너머 '전시회'를 할 수 있기를

“보여줘.”


어느 날 스승이 철학흥신소의 전시회를 한번 열어보자고 했다. 전시회의 전권을 나와 친구 두명에게 맡겼다. 그리고 덧붙였다. “학예회처럼 하면 나는 안 간다.” 그 말을 듣자마자 어떤 의미인지 한 방에 알았다. 평소 내 새끼 이뻐서 우쭈쭈하는 부모들을 나무라던 스승이다. 그러니까 우리도 우리 애들 이쁘다고 우쭈쭈하지 말고, 세상 사람들에게 정말로 해야 하는 이야기를 하라는 뜻이었다. 이제 우리끼리 서로 빨아주는 거 그만하고, 우리가 누구인지 먼지 한 톨만큼도 관심 없는 세상의 진짜 ‘타자’들 앞에 서서 당당하게 정면승부 한 번 해보자는 거다. 언젠가 스승이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철학을 배우고 이제 부모가 원하는 삶과 다른 방향의 삶을 살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여전히 부모의 시선에 연연하던 시기였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생겼는데, 그것을 부모가 싫어할까봐, 그래서 부모가 더 이상 나에게 관심 가져주지 않고 차갑게 대할까봐 눈치를 보던 시기였다. 부모가 원하는 삶은 살지 않을 거면서, 여전히 부모의 관심과 애정은 원하는 어린애 같은 정서 상태. 그 어린애 같은 마음 때문에 부모에게 서운했다. 왜 내 삶에 무관심하냐고, 무릇 ‘부모’라면 자식이 어떤 삶을 살든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지켜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적어도 비난하지는 않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 서운함에 잠식되어 있을 때쯤 스승이 나에게 말했다.


“네가 네 가족한테조차 네 삶을 설득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너를 아예 모르는 세상 사람들에게 인문주의를 설득할 수 있겠니.”


그 말을 듣고 머리를 한 대 세게 후려 맞은 것 같았다. 부끄러웠다. 스승은 가족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았다. 스승은 자신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 세상의 진짜 '타자’에서부터 시작했다.  길거리의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 냅다 외친 셈이다. “나는 이렇게 사는 사람이고, 당신들도 이렇게 사는 게 진짜 행복한 거요!” 당연히 그 목소리는 오랜 시간 세상의 소음에 묻혔다. 그 시간 동안 스승은 세상 사람들의 무관심과 혐오를 견뎌냈다. 이제 철학흥신소가 생긴지 8년이다. 이제 스승의 목소리를 듣고 자기도 이 삶을 살아보겠다고 마음먹은 이가 열 몇 명 남짓이다. 모든 고귀한 것은 드물고 귀하다. 모든 고귀한 것은 시간의 응축이기 때문이다. 한 걸음씩 조심스레 내딛었던 시간과 정성의 응축. 그래서 모든 고귀한 것은 느리다.




전시회가 끝났다. 전시회 둘쨋날, 일찍 퇴근을 해서 혼자 방청소를 했다. 벽에 덕지덕지 붙여놓은 전시회 관련 자료들을 전부 떼어내서 쓰레기봉투에 집어넣었다. 요 몇 주 정신없었던 내 마음 상태처럼 방도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받은 꽃들을 정성스레 다듬어서 꽃병에 꽂았다. 마라샹궈를 시켜놓고 맥주 한 캔을 땄다. 행복했다.


밤에 혼자 산책을 나왔다. 밤공기가 시원했다. 마음이 홀가분한데 또 허했다. 언젠가 스승이 한 권의 책을 탈고하면 그런 허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이 허한 마음이 바로 공허가 아니라 소진의 감정이구나. 내가 가진 것을 다 써버려서 비어버린 느낌. 예전에 일을 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예전에는 보통 몇 주 동안 시름하던 큰 일 하나를 무사히 끝내면 그저 안도하거나 홀가분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물론 안도하고 홀가분한 마음이 없지는 않았는데 딱히 기분이 고조되지는 않았다. 그냥 잠잠했다. 산책을 하며 내일은 꼭 운동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내일 운동갈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았다. 일상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몸과 마음을 다시 잘 채우고 싶었다. 앞으로도 이런 고요한 마음으로 그냥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해나가야 하는 거구나.




일상으로 돌아오고 요 며칠 동안, 전시에 대해 복기를 해보았다. 후회는 없었고 아쉬움은 있었다. 의미 있는 일을 할 때는 반드시 모든 걸 소진해야 한다. 여지를 남기면 그 여지만큼 후회가 남으니까. 그러면 지금 나의 한계가 어디인지,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명료하게 고찰할 수가 없다. 내가 여지를 남겨놓은 만큼 후회라는 이름의 자기기만이 따라붙을 테니까. 어쩌면 내 지금 상태를 직면하고 싶지 않기에 의미 있는 일을 할 때일수록 일부러 여지를 남기고 소진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다. 다행히 스승이 나를 빡세게 키운 덕에 이번 일에 여지를 남기지는 않았다. 그래서 후회되는 것은 없다. 유일하게 후회되는 것은 내가 스케줄 관리를 잘 못한 탓에 함께 일하는 친구에게 막판에 일을 너무 몰아서 준 것뿐이다. 하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그 아쉬움은 사후적인 것이다. 내가 소진하였기에 내 현재 스코어를 알게 되어 비로소 드러난 아쉬움.


내가 준비한 전시는 학예회 같은 전시였다. 전시회를 무사히 끝내고 내가 스스로에게 내린 총평이다. 이건 자기비하나 겸손보다는 자기만족에 가까운 총평이다. 전시회를 끝내고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내 새끼 이뻐서 우쭈쭈하는 부모의 마음과 같은 곳이라는 걸 알았다. 이번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즐겁고 뭉클한 순간이 많았다. 함께 오랜 시간 같이 해온 소중한 친구들을 한 명 한 명 예쁘게 포장해서 다 반짝이는 주인공으로 만들어주고 싶었다. 내가 이 친구들이 예뻐보이는 만큼, 세상 사람들도 이 친구들이 예뻐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이번 전시회를 준비하는 내 가장 큰 동력이었다. 친구들의 작품을 어떻게 보여줄까 고민하면서 그 친구들이 쓴 글, 그 친구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내가 그 친구를 생각했을 때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 가장 반짝였던 순간들을 하나의 ‘작품’으로 응결시키고 싶었다. 그러면서 알았다. 애정을 가지고 지켜본 대상이라면, 어떤 한 순간의 표정조차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 표정에 그 친구가 아름다워지려고 애썼던 시간들이 응축되어 있으니까. 그런데 애정을 가지고 친구들의 작품을 고르다가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야 이 친구들을 좋아하니까 이 모든 게 뭉클한 것이지, 전시장의 차가운 벽에서 이 친구들을 처음 만난 사람들은 이게 대체 뭔가 싶지 않을까?’ 그 현타가 오고 나서부터 친구들 한 명 한 명에 서사를 부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설명이 길어지고 급기야 도록까지 추가되었다. 전반적으로 '설명충의 학예회' 같았다고 생각한다. 아직 전시회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지금,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찬물 끼얹는 모양새가 되겠지만, 내가 한 일에 대해 스스로 내린 냉정한 평가는 그거다. 그게 지금 내가 서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제 '나’에서 빠져나와 ‘내 가족’에 매몰되어 있는 것 아닐까. 내가 지금 서 있는 지점이 내 새끼 이뻐서 과몰입하는 부모인 것 같다. 물론 예전에는 거기까지도 못 갔다. 예전에 나는 부모가 아니라 아이 입장이었다. 그래서 누군가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보다는 내가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아이는 자기가 아닌 다른 아이가 관심 받는 것을 참지 못하니까. 하지만 부모는 자신은 한 발자국 물러나 자기 아이들이 주인공이 되는 무대를 만들어주고 싶어한다. 다행히 나는 이 공동체를 정말로 '내 가족'으로 받아들이긴 했나 보다. 그래서 이번에 내가 주인공이 되는 것에는 정말로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나의 모든 관심은 우리 ‘애들’을 어떻게 주인공으로 만들어줄까 였다. 하지만 전시를 하면서 세상과 처음으로 얕게나마 연결되어 알게 되었다. 세상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 애들에게도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내 새끼는 나만 예쁜 것이다. 나만 내 새끼와 함께 시간을 보냈고, 나만 내 새끼의 표정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내 새끼 내 눈에 이뻐서 아무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 카톡 사진 백장 보내는 팔불출 엄마 같은 짓을 했다. 나의 ‘우리’는 너무 이 공동체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 아닐까.


이번 전시회를 '나’, ‘나-너’, ‘나-너-우리’, 이렇게 세 개의 섹션으로 나눴다. 사실 그 섹션에 맞게 작품을 선정하면서도 현타가 왔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현주소도 보였다. 왜 스승이 전시회를 해서 세상 밖으로 나가자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 공동체의 고인물인 나조차 ‘나-너-우리’ 섹션에 낼 작품이 없었다. 우리 공동체의 이야기는 모조리 ‘나’ 혹은 '나-너'에 매몰되어 있었다. 물론 나의 기쁨을 따르는 것은 중요하다. 나와 살을 맞대고 같이 생활하는 소중한 이들과 좋은 관계를 가꿔나가는 것 또한 중요하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진정한 ‘우리’는 내 연인, 내 가족, 내 새끼, 내 친구가 아닌, 내가 얼굴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타자’다. 그렇게 세상의 모든 ‘타자’를 ‘우리’로 상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편가르기’는 없어질 수 있다. 그게 스피노자가 말한 공통개념의 무한한 확장일 것이다. 왜 학예회는 보는 이에게 감동을 줄 수 없을까. 학예회에 감동 받는 것은 내 연인, 내 가족, 내 새끼, 내 친구 뿐이다. 왜냐하면 학예회는 그 친구가 주인공이 되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에 너무 안도하여, 내 친구들을 주인공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에는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에 나간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세상에 나간다는 것은, 내가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세상에 엄연히 존재하는 어떤 단독적인 타자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봐달라는, 아니면 ‘내 친구, 내 가족, 내 연인’을 봐달라는 마음으로는 세상에 나갈 수 없다. 전시회는 학예회가 아니어야 한다. 책은 SNS포스팅과는 달라야 한다.

"좌파가 된다는 것은 제 3세계의 문제들이 우리 마을의 문제보다 더 가깝다는 것을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 이것은 영혼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다." - 질 들뢰즈




길었던 전시회가 끝났다. 전시회가 끝난 날, 스승이 술 한잔을 사주며 얘기했다. “아직 철학흥신소는 시작도 안 했다.” 그 말을 듣고 빙긋 웃음이 났다. 그래, 내 주군은 이런 사람이지. 그 말을 듣고 고삐를 단단히 붙잡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달리는 호랑이 등에서 떨어지면 안 되니까.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불현 듯 이 문장이 떠올랐다. "개는 늑대를 키우지 못한다." 내가 늑대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개에서 늑대로 키워내야 하기 때문이다. 내 새끼 이쁘다고 우쭈쭈하는 것은 ‘개’다. ‘개’는 ‘개’밖에 길러내지 못한다. 내 품의 자식은 내 품이 너무 안락하고 따뜻해서 세상에 절대로 나갈 수 없다. 세상은 마찰 그 자체이니까. 어쩌면 스승은 이번 전시회를 나에게 맡기며 두 가지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혜원아, 너도 세상에 나가라. 그리고 너도 네가 사랑하는 이들이 세상에 나갈 수 있게 도와주어라.”


스승은 나에게 가르침을   항상 자신의 소중한 것을 건다. 지난 번에는 자신의 영혼과도 같은  편집을 초짜배기 편집자인 나에게 맡겼고, 이번에는  공동체 역사의 시작과도 같은 전시회를 역시나 아무것도 모르고 감성도 느낌도 로봇 수준인 나에게 맡겼다. 그리고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고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믿어준다 것은 그런 것이다.  '믿어준다' 뒷면에는 나에게 소중한  책보다, 나에게 소중한  전시회보다 네가 소중하다는 마음이 있다. 그런 마음을 받은 이는 당연히  소중한 것의 무게만큼 믿음에 보답하고자 애를  수밖에 없다. 사람은 사랑하는 이가 자신을 진짜로 '믿어주는' 만큼만 자라날  있다.


스승의 마음을 받았고, 그 마음에 보답하는 과정에서 스승의 가르침도 받았다. 여전히 내 삶은 중요하다. 나와 내 가족, 내 친구, 내 소중한 이와의 관계도 중요하다. 하지만 거기에만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결국은 얼굴 모르는 타자 앞에 서야 한다. 그리고 그와 대화해야 한다. 글이든 그림이든 삶이든 뭐든 간에 나의 목소리로 그를 설득해야 한다. 나만 기쁘게 사는 건 진정한 기쁨이 아니다. 나와 내 주변 사람들만 기쁘게 사는 것도 진정한 기쁨이 아니다. 인문주의의 핵심은 나와 너, 우리 모두가 기쁘게 살 때 비로소 다 함께 진정한 기쁨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기쁘게 살 것이고, 내 소중한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기뻐질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하지만 그게 종착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조금 더 커져야 한다. 내년 전시회에는 '우리'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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