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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May 25. 2023

나의 케빈에게 - 영화 '케빈에 대하여'

“나는 네가 버겁다.”


나는 그 말을 했어야 하는 걸까? 나에게는 아이가 없다. 하지만 ‘케빈’은 있다. 이 글은 나의 ‘케빈’에게 보내는 글이다.




<케빈에 대하여>는 싸이코패스에 관한 영화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평생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했다고 느낀 ‘케빈’은 16살 본인의 생일에 자기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친구들을 체육관에 가둬놓고 학살한다. 이 영화가 나왔던 시기에 미국에서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고가 몇 차례 터졌다고 한다. 이 영화는 그 사건들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한다. 아마도 나에게 ‘케빈’과 같은 존재가 없었다면, 나 또한 이 영화를 단지 싸이코패스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나와 다른 ‘무언가’로 이름 붙이고 선긋기 좋아하니까. 하지만 이 영화의 원제는 <We need to talk about Kevin>이다. 우리는 케빈에 대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선천적 싸이코패스에 대한 이야기일까? 아니다. 이 영화는 누구도 사랑할 준비가 되지 않은 나르시스트 엄마 ‘에바’와 그런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해 어깃장만 놓다가 결국 모두를 파멸로 몰아넣은 중2병 아들 ‘케빈’의 이야기다. 그리고 이것은 ‘나’와 나의 ‘케빈’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증말 지지리도 말 안 듣는다. 에바는 케빈을 양궁이 아니라 복싱을 시켰어야 한다.


‘에바’는 ‘케빈’을 날때부터 장애물이라 생각한다. 원치 않게 임신한 아이다. ‘케빈’을 출산하는 장면에서 산파가 외친다. “Stop resisting, Eva(저항하지 말아요, 에바).” 에바는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여행작가다. 에바는 자신이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생각하고 본인의 삶에 원치 않게 들어선 아이 케빈을 자신의 자유를 억압하는 족쇄로 여긴다. 그런 에바의 불안과 거부감은 당연히 케빈에게 전달된다. 케빈은 아주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아이로 자란다. 그런 케빈을 에바는 더욱 받아들이지 못한다. 케빈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늘 에바를 관찰한다. 그 아이는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케빈이 네다섯살쯤 되었을 때, 사건은 발생한다. 케빈의 양육을 위해 원치않게 교외로 이사한 에바는 새로운 집에 자신의 방을 꾸민다. 온 방에 세계 지도를 붙이고 흡족해하는 에바를 보고 케빈은 어깃장을 놓는다. “This room is dumb(이 방은 못생겼어).” 에바는 케빈의 어깃장을 이해하지 못한 채, 누구라도 ‘자기만의 방’을 가져야 한다며 도리어 케빈을 타이른다. 케빈은 자신을 버리고 세계로 떠나고 싶은 에바의 마음을 그 방에서 확인한다. 그날 케빈은 에바가 정성스레 꾸민 방에 물감을 난사한다. 마치 개가 영역표시를 하듯. 아마도 에바의 마음(방)에 온통 자신이 있길 바라는 표현이었으리라. 하지만 에바는 케빈의 물총을 빼앗아 바닥에 던져 부숴버린다. 그때 케빈의 마음은 부숴진다. 만일 그때 에바가 케빈을 안아주며 엄마는 네 곁에 있을 거라 말해줬다면 모든 것은 달라졌을까? 하지만 에바는 그 말을 할 수 없었겠지. 그때 에바는 케빈을 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을 테니까.


케빈이 고등학생이 될때까지 결벽증 에바는 물감으로 엉망이 된 방을 수선하지 않았다. 케빈도 그 사실을 알았어야 한다.


얼마 뒤 또 사건이 벌어진다. 에바는 케빈에게 수학을 가르치며 다시 한 번 케빈과 실랑이를 벌인다. 케빈은 똑똑한 아이다. 케빈은 수학도 배변도 다 할 줄 알지만 일부로 못하는 척 한다. 그렇게 아는 듯 모르는 듯 연기를 해서 에바의 관심을 받으려고 한다. 이를 알게된 에바는 화를 내고 케빈은 보란 듯이 에바 앞에서 기저귀에 똥을 싼다. 에바는 화를 내며 케빈의 기저귀를 갈고, 케빈은 새 기저귀에 다시 똥을 싼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에바는 케빈을 벽으로 밀친다. 그때 사건이 발생한다. 케빈의 팔이 부러져버린 것이다. 훗날 케빈은 이 사건을 두고 “엄마가 유일하게 나에게 정직했던 순간이지”라고 말한다. 케빈은 마치 에바로부터 “난 널 사랑하지 않아”라는 말을 듣기 위해 온힘을 다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마치 헤어지지 못하는 연인들이 상대가 먼저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주길 바라며 일부로 어깃장을 놓는 것처럼.


팔을 수술하고 돌아오는 길, 에바는 케빈에게 집에 가기 전에 가게에 들러 장을 보자고 한다. 케빈은 또다시 어깃장을 놓으며 자기는 지금 당장 집에 가고 싶다고 한다. 에바가 케빈에게 한 소리를 하려던 순간, 케빈이 자기가 다친 상처 부위를 쓰다듬으며 의미심장하게 에바를 쳐다본다. 에바는 케빈에게 알겠다며 가게에 들르지 않고 집으로 곧장 간다. 케빈은 에바가 자신을 벽에 던졌다는 사실을 아빠에게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케빈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에바 앞에서 그 상처를 쓰다듬으며 에바를 옭아맨다. 에바는 그런 케빈에게 줄곧 끌려다닌다. 에바에게 점점 케빈은 ‘의무’가 된다.


"엄마가 나에게 유일하게 정직했던 순간이지." 맞다, 이놈아. 근데 너도 정도껏 해야지!


케빈은 영악한 아이다. 케빈은 에바가 그 사건에 죄책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에바에게 사랑받기 위해, 아니 더 정확히는 에바에게 사랑받지 못한 것에 대한 한풀이를 하기 위해 그 죄책감을 이용한다. 그렇다면 에바는 무엇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일까? 케빈을 사랑하지 않은 것에 대한 죄책감일까? 아니다. 에바의 죄책감은 자신을 향해 있다. 에바는 자신이 ‘모성애가 없는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낀다. 케빈이 태어난 순간부터 에바는 케빈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신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 자기혐오가 에바가 케빈을 사랑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다. 에바는 자유로운 영혼이 아니다. 자유롭지 않기에 ‘세계여행’ 같은 허황된 자유를 꿈꾸는 영혼이다. 에바는 자신에게 들이닥친 ‘케빈’이라는 타자 하나를 어찌하지 못해 끙끙댄다. 에바는 결정했어야 한다. 케빈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천하의 쌍년 소리를 감당한 채 케빈을 버리고 자기 삶을 살러 떠날지. 이도 저도 못했던 에바의 마음은 케빈의 마음을 더욱 꼬아놓는다. 케빈은 듣고 싶었던 것 같다. “엄마는 날 좋아하지 않잖아. 이제 연기는 그만해.” 하지만 에바만큼이나 여렸던 케빈은 자기가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직면하지 못해 엄한 어깃장만 놓는다. 케빈의 꼬인 마음은 여동생을 향한 무차별적인 질투가 된다. 그리고 끝내는 모두를 파멸에 몰아넣은 파괴적인 마음이 된다. “내가 사랑받지 못했으니 너네들도 다 불행해야 해.” 총기 난사는 이례적인 사건이지만, ‘내가 불행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불행해져야 한다’는 마음은 이례적이지 않다. 학창 시절 나는 시험을 못 볼 것 같으면 내일 학교에 불이 나거나 전쟁이 나길 기도하곤 했다. 공부에 집착하는 엄마 때문에 그 당시 나에게 시험을 못 본다는 것은 ‘사랑받지 못함’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받지 못할 것 같으면 다른 사람도 모두 사랑받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마음. 그 마음은 ‘싸이코패스’나 ‘총기 난사범’만의 이례적인 마음이 아니다. 케빈은 단지 그 마음을 행동으로 옮겼을 뿐이다.


케빈이 모두를 죽이고 떠난 자리. 에바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에바는 그 동네, 그 집에 그대로 산다. 옆집에 케빈이 죽인 친구의 부모가 사는 집. 케빈이 자신의 딸과 남편마저 죽인 집. 그 집에서 매일 동네 사람들의 비난과 테러를 받고, 매일 밤 케빈과 가족들이 나오는 악몽을 꾸며 자신의 삶을 살아낸다. 동네 사람들은 에바를 가만 두지 않는다. 악몽에 시달리고 일어나 집 밖에 나오면 집과 차는 온통 빨간 페인트로 테러가 되어 있는 게 에바의 일상이다. 에바는 그 빨간 페인트를 영화 내내 애를 쓰며 지운다. 무거운 그라인더를 들고 벽을 갈아내고, 거친 솔로 바닥을 박박 문대며 힘들게 지워낸다. 그때마다 에바의 손은 마치 피처럼 빨간색으로 물든다. 에바는 빨간 페인트가 묻은 그 손을 또다시 힘들게 비벼가며 지운다. 에바는 더 이상 자유를 갈망하지 않는다. 한때 잘나가던 여행작가였던 에바는 한 여행사 사무실에서 온갖 부당함을 당하며 허드렛일을 한다. 에바는 그 모든 삶을 감당한다. 그 팍팍한 삶을 살면서 매달 케빈에게 면회를 간다. 케빈은 여전히 에바에게 어깃장을 놓는다. “사람들은 TV에서 모범생을 보지 않아. 나 같은 사람을 보지.” 케빈의 중2병은 여전하다. 그렇게 2년의 시간이 흐른다.



케빈이 성인교도소로 이감되기 전 마지막 면회에서 에바가 묻는다.


“성인 교도소에 가려니 떨리니?”

“떨리냐고? 거기가 어떤 곳인지 알기나 해?”


에바의 물음에 케빈은 따지듯이 묻는다. 평소와 달리 에바는 차분하게 답한다. “지금까지 잘 빠져나왔잖니. 미성년자고 약 때문이라고 주장했으니 한 2년 있다가 나올게다.” 에바는 더 이상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는다. 에바는 매일 밤 악몽을 꾸듯 자신의 과오를 고통스럽게 되돌아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바는 물을 수 있다. “너도 생각할 시간이 많았을 테니, 이제는 말해줘. 왜 그랬니?” 처음으로 케빈은 망설이며 답한다.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 에바는 말없이 케빈을 안아준다. 모든 걸 안다고 생각했던 거만한 꼬맹이 케빈은 엄마의 품에 가만히 안긴다. 더 이상 케빈은 모든 것을 엄마 탓으로 돌리지 못할 테다. 이제 케빈이 자신의 과오를 고통스럽게 돌아볼 시간이 시작되었으니까. 에바는 ‘성인(어른)‘이 되기 시작한 케빈을 두고 교도소를 나온다. 에바는 케빈을 통해 자유인이 되었다. 에바는 다시 ‘살인자 엄마’의 삶을 살아낼 것이다. 케빈도 ‘살인자’의 삶을 살아낼 것이다. 자유는 그렇게만 얻어진다.


케빈아, 이제 너도 네 삶의 무게를 져라.




한때 ‘에바’였던 나를 돌아본다. 나와 ‘케빈’의 관계를 돌아본다. 나는 방 안에 세계지도를 붙여놓고 있지도 않은 자유를 갈망하던 엄마였다. 나의 ‘케빈’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케빈’은 내 삶에 자신이 있을 곳이 없다는 걸 알았다. 내가 언제라도 자기를 버리고 자유를 찾아 떠나버릴 걸 알고 있었다. 자유를 갈망하게 된 다음부터 나는 ‘케빈’이 짐스러웠다. 나의 자유를 방해하는 장애물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중 사건이 일어났다. 나 또한 홧김에 '케빈'을 밀쳐 팔을 부러뜨리게 했다. 홧김에 그의 마음에 평생 상흔으로 남을 상처를 내었다. 나의 영악한 '케빈'은 그때부터 삐뚤어졌다. '케빈'은 그 사건으로 인해 내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정면으로 직면하지는 못했다. 대신 '케빈'은 그 사건을 무기 삼아 나를 옭아맸다. 내가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마다 내가 준 상처를 쓰윽 쓰다듬었다. 나는 상처받은 '케빈'에게 쩔쩔 맸다. '케빈'에게 미안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모성애가 없는 여자’일까봐 두려웠던 에바처럼,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상처준 나쁜 년’일까봐 무서워서였다. 나도, 에바도 ‘천하의 쌍년’이 되고 싶진 않았다. 자유는 갈망했지만 '천하의 썅년'이 될 용기는 없었다.


케빈은 왜 상처를 쓰다듬었을까? 왜 에바가 괴로워한다는 걸 알면서도 어깃장을 멈추지 못했을까? 영화 평론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싸이코패스가 사람들을 통제하고 싶은 마음 때문일까? 아니다. 케빈은 에바에게 말하고 싶었던 거다. “엄마는 나를 사랑해야 하는데, 왜 날 사랑하지 않아!” 케빈은 에바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엄마가 아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여리다. 그래서 케빈은 계속해서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익숙한 것과 좋아하는 것은 다르죠. 엄마는 나에게 익숙한 거죠.” 케빈이 그 말을 할 때 에바는 답을 피한다. 에바는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 본인의 모습을 인정할 수 없다. 반대로 케빈은 집요하게 에바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까발리려고 한다. 그래야 본인은 ‘엄마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불쌍한 어린아이’에 영원히 머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지독한 자기연민 때문에 케빈은 여동생을 질투하고 친구들을 학살한 것에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본인이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죄책감을 느낄 수 없다.


나는 나의 '케빈'이 버거웠다. “넌 날 사랑해야 하는데, 왜 날 사랑하지 않아!” 온몸으로 그 말을 내뿜는 그가 버거웠다.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까발려진 다음부터는 더욱 버거웠다. ‘케빈’이 내가 무엇을 할 때마다 내가 준 상처를 쓰다듬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얘기했어야 한다. “상처 줘서 미안하다. 하지만 너에게 영원히 미안할 수는 없다.” 내가 단호하지 못했던 것은 나 또한 ‘천하의 쌍년’이 되고 싶지 않아서였다. 케빈에게 쩔쩔 맸다. 내가 착한 년 될라고. 그 버거운 마음은 점점 의무가 되었다. 에바는 케빈과 한 공간에 있는 것조차 불편해하면서 케빈에게 단지 ‘엄마의 의무’를 다하려고 같이 미니골프를 치고 밥을 먹자고 한다. 케빈은 안다. 그것은 자신을 위한 마음이 아니라, 본인을 위한 마음이라는 것을. 그래서 케빈은 에바와 나들이를 하는 동안에도 계속 툴툴대며 어깃장만 놓는다. 에바는 그런 케빈을 무시하고 자신의 의무만을 다하려고 한다. 에바는 골프를 치러가서 케빈이 홀에 공을 넣자마자 “네가 이겼네”라고 한 마디 하고 휙 가버린다. 마치 하기 싫은 숙제를 억지로 끝낸 아이처럼. 나도 나의 ‘케빈’에게 그랬다. 이미 엉킬 대로 엉킨 관계. 모든 것이 ‘의무’였다. 그래서 짜증만 쌓였다.


의무만 가득찬 식사자리. 에바도 '착한 척'을 그만했어야 한다.


에바는 언제 의무에서 벗어났는가? 살인자의 엄마가 되었을 때다. ‘아들을 버린 엄마’가 아니라, ‘아들을 살인자로 만든 엄마’가 되었을 때, 에바는 비로소 의무에서 벗어났다. 둘은 떨어져 지냈다. 그 동안 에바는 고통스럽게 자신의 잘못을 마주하며 속죄의 시간을 보냈다. 케빈도 마찬가지다. 케빈은 에바가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았기에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지막 면회에서 에바에게 말한다.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모르겠어.” 케빈도 받아들인 것이다. 자신의 삶에 자신의 책임도 있었음을. 케빈은 ‘성인' 교도소에서 2년의 시간을 보낼 것이다. 어떤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고, 모두를 파멸로 몰아넣고나서야 비로소 끝이 난다.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이 안타까운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 마음에 새길 것이다. 케빈의 팔은 내가 부러뜨렸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척 한 대가는 크다. 사랑을 의무로 만들 때 가장 큰 불행의 씨앗은 자란다. 어떤 관계는 떨어져 있을 때만 끝이 난다. 자유는 여행이 아니다. 자유는 필사적으로 빨간 페인트를 닦아내는 과정이다. 약점은 내가 너의 마음을 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연연할 때 잡히는 것이다. 나는 케빈에게 말했어야 한다. “그만해라.” 나는 케빈에게 말했어야 한다. “그만하자.” 내가 널 사랑해야 하는 의무 같은 건 없었다. 그 의무에 스스로 얽매인 것은 ‘좋은 사람’이고 싶었던 나의 기만, 그리고 널 떠날 수 없었던 나의 불안 때문이었겠지. 어쩌면 사랑은 ‘천하의 썅년’만 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천하의 썅년'이 된 에바는 처음으로 케빈을 안아준다. 에바는 그토록 거부했던 케빈의 엄마가 된다. 살인자의 엄마가 된다. 엄마는 그렇게 되는 것인가 보다. 사랑은 그렇게 하는 것인가 보다. 아무도 안아주지 못했던 에바가 한 사람은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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