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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Dec 21. 2022

맞는 건 어떤 기분일까? - 애니 '내 몸이 사라졌다'

“맞는 건 어떤 기분일까?"


며칠 전 뜬금없이 든 생각이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찐득한 어둠이 조금씩 내 마음을 덮치고 있었다. 볕이 안 드는 작은 방에서 눈을 떠서일까. 오랜만에 혼자 잠에 드는 탓에 유학생활의 어두운 기억이 떠올라서일까. 아주 조금씩 눅눅한 기운이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있다는 걸 느꼈다. ‘죽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크로스핏을 하고 한강을 걷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냈다. 일을 하고 전시회 준비도 하고 글도 열심히 썼다. 그래서 그나마 연기가 피어오르는 속도를 늦출 수 있었던 것일 테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드는 그 음습한 기운이 가시지는 않았다. 알고 있다. 이 음습한 기운의 정체를. 나는 지금 불안하고 무서운 것이다. 진짜로 ‘차이’나는 상황에 던져졌을 때, 두렵고 무섭다. 이 삶이 어디로 갈지 깜깜한 터널 안에 있는 것 같으니까. 언젠가 한 번 진하게 겪었던 ‘카오스’ 상태다. 그래도 카오스의 짬바가 생겨서 그런지 이번에는 빨리 알아차렸다. 나는 무섭다. 나우펠의 '잘려나간 손'은 절대로 다시 붙지 않는다. 잘린 손은 끈질기게 나우펠을 찾고 쫒아 겨우 잠든 나우펠의 침대 위에 도착한다. '잘려나간 손'은 자신이 잘려나간 자리에 가서 원래 있었던 그 모습 그대로 가만히 눕는다. 하지만 그 순간, '잘려나간 손'은 직감한다. 한번 잘린 손은 다시 붙을 수 없음을. 그날 나우펠의 '잘려나간 손'은 나우펠 곁에 밤새도록 누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왜인지 모르겠다. 갑자기 맞고 싶었다. 맞는 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 프로복서이기도 한 내 철학 스승에게 문자를 보냈다. “쌤, 내일 물리치료 예약되나요?” “된다. 방검복 입고 와라.” 카톡을 보내고 나니 손에 땀이 났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쌤 진짜 가차 없이 때릴 것 같은데. 쌤은 내가 왜 지금 맞고 싶은지도 당연히 알 텐데. 긴장감 속에서 웃음이 났다. “나를 죽여줘.” 요 근래 내가 얼마나 부르짖었던가. 그 순간이 내일로 다가왔음이 느껴졌다. 나를 기꺼이 죽여줄 수 있는 사람은 스승 밖에 없다는 사실도.



꼭 누드모델하기 전날 같았다. 일일 체험권을 결제해야 돼서 체육관에 전화를 해야하는데 저녁시간까지 까먹어버렸다. 나는 진짜 두려운 걸 저지르면 그 순간이 닥칠 때까지 기억이 잘 날라간다. 누드모델할 때도 그랬다. 신청해놓고 2주 정도 시간이 있었는데 그 2주 동안 내가 누드모델을 해야한다는 사실을 억지로 의식하지 않으면 자꾸 까먹었다. 저녁에 겨우 생각나서 체육관에 전화를 했다. 아, 누드모델은 쉬운 거였구나. 나 내일 누드모델 하러 가서 옷 벗고 포즈 취하라고 하면 훌렁훌렁 잘 벗을 것 같은데. 뒤척뒤척 하다가 잠에 들었다.


가기 싫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점심 먹고 빨래 돌리고 오토바이 타고 체육관에 가려는데. 아, 씨발. 진짜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스승한테 “저 오늘 못 가겠어요”라고 문자 보낼까 잠시 생각했다. '아니야, 이런 생각이 들때야말로 꼭 가야할 때지!' 오토바이 시동을 켜고 머뭇대다가 신도림 복싱체육관으로 갔다. 가는 길에 멍 때리다가 길도 한번 놓쳤다. 복싱장에 가니까 쌤이랑 친구들이 있었다. 스트레칭을 하고 줄넘기를 하고 관장이 가르쳐준 대로 잠시 자세 연습을 했다. 쌤이 나보고 링으로 올라 오라고 했다. 같이 철학을 배우고 복싱도 하는 친구들이 링 밖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뭐가 어떻게 지나간지 모르겠다. 쌤은 정말로 얄미운 얼굴로 나를 도발했고, 나는 계속 쌤을 쫒아다니면서 때리려고 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정말 한 대를 못 맞추겠더라. 쌤이 가끔 배를 때리면 윽 소리가 났다. 그런데 재밌었다. 존나 재밌었다. 물론 쌤이 나에게 다 맞춰서 접대 스파링 해주니까 재밌었던 것이겠지만, 그래도 존나 재밌었다. 계속 쌤 눈을 보는데, 약이 오르면서도 뭐랄까. 말로 표현하지 못할 유대감 같은 걸 느꼈다. 알렉시아가 비녀를 들고 뱅상에게 덤비다가 저지 당하고 뱅상이랑 춤을 추는 장면. 그 장면이 겹쳐졌다. 나는 참 좋은 아버지를 두었다고 생각했다.


몸치에 아무것도 못하지만, '체력'과 '광기'만은 인정받은 접대스파링. 어쩌면 내가 가진 유일한 무기가 그거 두 개뿐인지도 모르겠다.  


4라운드가 끝나고 정신 없는 상태로  옆에 앉아 있는데, 살면서 그렇게 몸에 열이 많이  적은 처음이었다. 크로스핏을 해도 땀은 많이 나는데, 그렇게 몸이 정말 김이  것처럼 데워지지는 않았었다. 아마도  전에 내가 멈춰버리기 때문일 테지. 하지만 이건  멈추면 그대로 맞는 거니까 멈출 수가 없었다. 즐거웠다. 운동해서 유쾌해진 적은 있었지만, 운동해서 해방감을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땀에 쩔은 채 오토바이를 타고 방으로 향했다. 하늘은 파랬고 바람은 시원했다. 오토바이에서 꺄하하하하하 소리를 질렀다. 눈에 살짝 눈물이 돌았다. 세상에 심각한 일은 없구나. 심각한 마음만 있을 뿐. 바람이 시원했다. 마음이 시원했다. 잠시 멈춰 복숭아 쥬스 한잔을 들이켰다. 쥬스맛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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