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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Dec 09. 2022

닫힌 마음 - 영화 '체리향기'

체리향기(1997, Ta'm e guilass),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바디는 자동차를 몰고 황량한 벌판을 달려간다. 그는 지나치는 사람들을 눈여겨 보며 자신의 차에 동승할 사람을 찾는다. 그가 찾고 있는 사람은 수면제를 먹고 누운 자신의 위로 흙을 덮어 줄 사람. 돈은 얼마든지 주겠다는 그의 간절한 부탁에도 사람들은 고개를 젓는다. 애띤 얼굴의 군인도, 온화한 미소의 신학도도 죽음이란 단어 앞에선 단호하게 외면할 뿐. 드디어 한 노인이 그의 제안을 수락한다. - 다음영화




이상하게 이란 감독의 영화가 나랑 결이 맞는다. 이 영화를 보면서 예전에 봤던 ‘우작’이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그때 내가 얼마나 그 영화에 감정이입해서 봤는지, 그 영화는 이 ‘체리향기’보다도 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도 혼자 씩씩대며 봤다. 그 영화 주인공에게 외치고 싶었다. “야, 지금 네 동생 유소프가 너 도와주려고 눈치보고 있잖아.” 그 주인공이 계속 해서 자기에게 찾아오는 버스들을 놓치는 게 너무 안타까웠다. 그 영화에서 내가 제일 인상 깊었던 씬이 있다. 주인공은 정말 강박적인 남자인데 직업이 사진가다. 그는 항상 집안의 실내 스튜디오에서 조형물을 예민하게 배치하지 않으면 사진을 찍지 않는다. 어느 날 그가 덜떨어진 동생 유소프와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햇살이 쏟아지는 한 들판에 가만히 멈춰선다. 그가 말한다. “여기 참 사진 찍기 좋은 곳이다.” 유소프가 눈치를 살피며 말한다. “지금 사진기 설치할까요?” 그는 햇살이 쏟아지는 아름다운 들판을 가만히 응시한다. 몇 초의 정적이 흐른다. 그 몇 초의 정적이 나에게 어떤 스릴러 영화보다도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가 말한다. “됐다. 귀찮다.”


나는 화가 났다. 야, 지금 그 차에서 내려서 사진을 찍으라고. 맨날 너 눈치 보는 동생 유소프가 지금도 눈치를 보면서 도와주려고 하잖아. 지금이 기회잖아. 왜 찾아온 기회도 잡지를 못해. 들판이, 햇살이, 유소프가 지금 너에게 기회를 만들어줬잖아. 넌 지금 그 차에서 내리기만 하면 되잖아. 고구마를 백 개를 먹은 것 같았다. 화가 났다. 자기 주변에 쏟아지는 마음들을 하나도 보지를 못하고, 심지어 그 마음을 거의 코앞에 상까지 차려서 갖다 줘도 먹지를 못하니. 그는 ‘닫힌 마음’이다. 아무리 세상이 그의 방문을 두들겨도 그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좋아했던 친구가 있었다. 그는 '닫힌 마음'이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겨울왕국'의 엘사가 생각났다. 어린 엘사는 자기에게 사람들을 다치게 하는 능력이 있는 걸 알고나서 방에 틀어막혀 나오지 않는다. 엘사를 좋아하는 동생 안나는 엘사의 방 앞에서 함께 놀자며 "Do you wanna build a snowman?"을 부른다. 안나의 노래를 듣고 엘사가 말한다. "Go away, Anna." 닫힌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딱 그 엘사의 방 같다. 엘사를 좋아하게 되면 그 닫힌 방문 앞에 혼자 앉아 하염없이 "눈사람 만들래?" 노래를 불러야 한다.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 안나는 언젠가 알게 될 수밖에 없다. 엘사는 방에서 나올 생각이 없는데, 자기가 맨날 닫힌 문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을. 방에서 나올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방 밖에서 함께 놀자며 불러대는 노래는 소음일 수밖에 없다. 소음은 폭력이다. 그걸 깨달은 안나는 엘사의 방을 떠난다. "아침에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창 밖을 보고 있으면 너무 외로운데 편해." 엘사가 말했다. 삶은 편하고 외롭거나, 안 편하고 안 외로운 양자택일의 선택지다.




나는 언제 죽었는가.  번이 생각난다.  번은 내가  사고를 저질러서 내가 속해있는 인문공동체를 거의 파괴 직전까지 몰고 갔을 . 그때  공동체 공간에 있는 간이침대에서 공황이 왔다. 내가 저지른 일의 무게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죄책감에 짓눌려서 온몸에 피가  통해 저릿저릿했다.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나는  이기심으로  공간을 폭파시킬  했는데, 지금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며  공간에 다시 와서 처울기나 하고 있다니. 그때 다른 방에서는 수업을 하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스승과 친구가 나를 보러 방에 들어왔다. 그때 정말로 스승을  면목이 없었다. 자기를 죽일   나를 스승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친구는 내가 지금  이러는지 이해하지 못해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하며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내가 스승과 친구를 보고 갑자기 연어 샌드위치를  갖다 달라고 했다.  친구가 그때의 상황을 말하길, 내가 갑자기 눈물을 멈추고  연어 샌드위치를 허겁지겁 먹더니 "맛있어ㅠㅠ"라고 했다더라. 아마도 그게 죽기 직전에 찾은 나의 '체리향기' 아니었나 싶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겸손해졌다.  계기로, 나의 거만함과 자기연민이 차례로 깨졌다. 진심으로 스승에게 고마워졌고, 진심으로 내가 속해있는 공동체에 고마워졌다. 나는 그때  공동체 때문에 살아났다. 그때 스승이 이야기해줬다. 인생에 감당할  없는 고난이 찾아와  때려치고 죽고 싶을  보고 싶은 사람  , 가고 싶은   곳만 있어도  사람은 다시 살아갈  있다고. 하지만 마음이 닫힌 사람은 인생의 고난이 찾아왔을  혼자만의 방에 틀어박힌다고.  사람은  방에서 나올  없다. 좋아하는   하나도 없는 사람은 자신만에 세계에서 절대로 빠져나올  없다.



마음이 닫혀 있으면 세상의 아름다움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주는 따뜻한 마음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나도 닫힌 마음이었기에 이해는 하지만, 닫힌 마음을 열고 나오니 마음을 닫고 사는 것보다 미련한 게 없다. 염치는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만, 그만큼 사람의 마음을 가득 차게 한다. 사랑받은 기억은 나를 살게 한다. 하지만 마음이 닫혀 있으면 내가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어제 그런 순간이 있었다. 얼마 전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 그 상처가 시큰거려 계속 마음이 시렸다. 운동을 하고 한강을 걷고 글을 쓰고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 그 시린 마음이 잘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어제 편의점에 갔다가 편의점 지붕 앞에서 비가 오는 걸 지켜보는데 갑자기 “아, 삶이 좆같은데 행복하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뜬금없이 “나 사랑 받고 있구나”라는 자각이 느낌으로 왔다. 내가 사랑받은 순간들이 디테일하게 기억난 게 아니라, 그냥 어떤 감정의 덩어리로 훅 하고 몸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충만했다. 삶은 좆같은데 마음이 따뜻했다. 공동체에 갔다. 정겨운 얼굴들이 있었다. 고맙고 미안했다. 선물사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잘해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힘든 얘기 들어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요즘 나는 마음이 힘들면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평소 사주고 싶었던 선물을 사주거나 해주고 싶었던 말을 편지에 담아 쓴다. 요즘 나에게 그런 감성이 생겼다. "상처받았을 때 더 사랑해야 한다." 물론 그 상처 준 사람을 꼭 사랑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상처를 받아서 죽고 싶어질 때 머뭇거리면 안되더라. 운동하고 맛있는 거 먹는 것은 죽고 싶은 마음이 커지는 걸 막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사랑-없음'으로 상처받아 죽고 싶어졌다면, '사랑-있음'으로 다시 마음을 채워야 한다. 그래서 상처받으면 더 사랑하려고 애써야 한다.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언젠가 스승이 '사랑-없음'에 상처받아 한 말이 생각난다.


진정으로 가성비를 넘치는 삶은 내가 받은 작은 사랑의 순간들을 잘 기억하는 것이다. 그게 진정한 가성비다. 작은 ‘사랑-있음’의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다 느끼면, 내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 금방 알게 된다. 사실 거창한 게 필요한 것도 아니다. 나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눈빛. “괜찮아?”라고 조심스레 물어보는 한 마디. 나를 웃게 하고, 웃는 나를 보고 웃는 너의 모습. 비 오는 날 우산을 씌워주고 같이 걸어가 주는 것. 자본주의의 세계는 ‘티끌 모아 티끌’이라지만, 사랑의 세계는 ‘티끌 모아 태산’이다. 그 작은 사랑을 다 느낄 수 있다면, 내 비어버린 마음은 금세 차오를 수 있다. 그보다 더 가성비 넘치는 삶도 없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철학자 강신주의 책 제목이다. 영화 ‘체리향기’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저 문장일 것 같다. 체리가 맛있어서 살고 싶어진다. 체리가 맛있어서 살고 싶어지고, 그 맛있는 체리를 아내에게 가져다주고 싶어서 살고 싶어지고, 그 맛있는 체리를 맛있게 먹는 아내를 보고 싶어서 살고 싶어진다. 사랑하는 게 있다는 건 그 자체로 행복이다. 그것이 나를 사랑해줘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것만이 내가 살아야할 이유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게 없으면 살 이유가 없다. 내가 먹은 이 '체리’를 네가 먹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오늘 하루는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내가 두 번째로 죽은 날이 기억난다. 내가 닫힌 마음 때문에 다시 한 번 자기고립에 빠져 죽고 싶어졌던 날. 참다 참다 어찌할 바를 몰라 스승을 한 레스토랑에 불렀다. 스승을 보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다. 메뉴를 시키기도 전에 메뉴판을 붙잡고 우는 나를 보고 스승이 말했다. "너는 언제나 '없는 것'만 보고 '있는 것'은 보지 못한다. 너는 늘 '없는 것'만 보고 있기에 자꾸만 공허하고 허무해지는 거다." 스승이 말을 이었다. "처음에 너와 내가 가까워진 이유에는 그 당시 내가 돈이 없었고 너는 돈이 있었던 이유도 한 몫했겠지. 하지만 나는 돈이 없는 것이 '없는 것'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돈이 없어서 너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니까." 그 말을 듣고 사랑은 '없는 것'마저 '있는 것'으로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날 내 이데아의 세계는 무너졌다. 나는 두 번 죽었고, 두 개의 문을 열고 나왔다. 문을 열고 나온 세상은 우스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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