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이렇게 재밌는 거라니!” 우연한 기회로 소설 몇 권을 연달아 읽고 있다. 누군가가 <그리스인 조르바>가 자신의 인생 소설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언젠가 나도 끌렸던 적이 있지만 아직 읽을 엄두를 못내고 있던 책이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찾아 읽었다. 웃음이 피식피식 났다. 내가 왜 예전에 그 소설에 끌렸는지 알 것 같아서. 내 인생 소설은 무엇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중학교 때 읽었던 <데미안>이 생각났다. <데미안>을 이십 년 만에 다시 읽었다. 또 웃음이 피식피식 났다. 학창시절 내가 왜 그렇게 <데미안>에 심취했는지 알 것 같아서. 헤르만 헤세를 찾아보았다. 나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고 비슷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소설 <싯다르타>를 사서 책장에 꽂아놓았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작년에 한 친구의 추천글로 읽게 되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눈물이 났던 책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다시 읽었다. 역시나 좋았다. 사실 나는 소설을 잘 못 읽는다. 어린 시절 억지로 책을 많이 읽은 탓에 책 자체가 싫어진 것도 있고, 소설은 한번 읽으면 잘 이해가 되지 않아 더 싫었다. 등장인물도 너무 많고 외국 배경이라 지명도 이름도 너무 어렵고 역사적 사실을 모르면 이해가 안 되고 문장도 너무 길고 수식도 많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톨스토이의 소설만큼은 너무 잘 읽혔다. 톨스토이를 읽고 처음으로, 운동도 나와 결이 맞는 운동을 찾아야 하는 것처럼 소설도 나와 결이 맞는 소설가를 먼저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다시 읽고 톨스토이의 다른 단편 <악마>를 읽어보았다. 거실 소파에서 읽다가 진정이 되지 않아서 몇 번이고 책을 내려놓고 거실을 서성거렸다. “소설이 이런 거였어?”라는 말이 연신 나왔다. 삶의 기쁨은 언제나 마주침의 연결로만 발견된다.
톨스토이의 소설은 너무나도 리얼하다. 장편은 제대로 안 읽어봐서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단편은 보편적인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는 보편적인 사건을 정말이지 담백하게 그려낸다. 극적인 전개도, 복잡한 설정도 없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평범하게 살아온 한 판사가 어느 날 원인을 모르는 병을 발견한 뒤 죽기까지 몇 일의 심리 묘사를 다룬 작품이다. <악마> 역시 마찬가지다. 주인공 예브게니는 부유하고 보수적인 집안에서 별 탈 없이 자란 평범한 청년이다. 아버지를 여읜 뒤 홀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가 운영하던 시골 농장을 이어서 운영하게 된다. 그 시골 마을에서 한 농부의 아내 스체파니다를 만나게 되고 젊은 두 남녀는 몇 차례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물론 예브게니는 스체파니다와의 만남을 ‘젊은 자신이 아무도 없는 시골 마을에서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행동’이라고 치부한다. 스체파니다와의 관계는 ‘욕정의 해소’말고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몇 년 뒤 예브게니는 자신과 어울리는 여자인 리자를 만나 결혼을 한다. “리자 안넨스카야는 처음에는 그냥 예브게니의 마음에 들었던 정도지만 아내로 맞아들일 결심을 하고 나자 그녀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훨씬 더 깊어지는 것을 느꼈으며, 비로소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인정했다.” 리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리자는 자신을 매혹시키는 모든 남성들과 끊임없이 사랑에 빠졌고, 오직 사랑에 빠질 때만 행복을 느꼈”지만, “어머니가 그녀에게 예브게니가 진지하게 관심을 보이는 것 같다는 말을 하자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관심해졌다.” 리자는 결혼생활에 헌신적인 여자였다. 그녀는 “언제나 남편이 좋아하고 즐거워할 일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살폈으며, 아무리 어려운 일일지라도 남편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 예브게니는 결혼생활이 만족스러웠다. “모든 것이 순탄하고 기분 좋게 흘러갔다.” 마을 촌부 스체파니다가 자신 눈 앞에 다시 나타나기 전까지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스체파니다는 예브게니 앞에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그때마다 예브게니는 그녀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면서도 다 지나간 일이라고 자신의 마음을 외면한다. 예브게니는 자신의 평온하고 완벽한 생활을 깰 마음이 없다. 하지만 스체파니다는 숲길에서, 마당에서, 오솔길에서 불쑥불쑥 나타나 그의 고요한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예브게니는 일에도 매달려보고, 육체노동으로 몸을 혹사시켜보기도 하고, 이 모든 사실이 밝혀졌을 때 자신이 아내와 장모, 마을 사람들로부터 받게 될 수모를 떠올려보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정오 무렵, 이전에 그녀가 풀을 베고 오다 마주쳤던 그 시각이 가까워지면 어느새 숲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그는 자신은 산책을 하고 싶은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체파니다와 눈을 마주칠 뻔한 순간에 누군가가 자신을 불러세우자 ‘하나님이 자신을 도운 것’이라 안도했다. 아, 몸과 마음이 분리된 사람의 영혼은 어떤 것인지. 예브게니의 몸은 끊임없이 스체파니다를 향한다. 그녀가 있는 숲, 오솔길, 그녀의 집 뒤뜰에까지 찾아간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필사적으로 그를 집에 묶어놓으려 한다. 집에서 리자와 장모, 홀어머니와 함께 하는 점심 티 타임에 예브게니는 멍하니 넋을 놓고 있다. 자신의 욕망을 발견해버린 사람은 더 이상 그 전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다. 몸은 끊임없이 외친다. “네가 있을 곳은 스체파니다의 곁이야.” 몸의 목소리를 거부한 채 삶을 이어가는 사람은 빈 껍데기인 채로 살아가는 것과 같다. 예브게니의 영혼은 죽어가고 있다.
예브게니는 자기 삶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 발악을 한다. 스체파니다와의 관계를 삼촌에게 털어놓는다. 삼촌은 아내 리자와 둘이 호사스러운 여행을 떠나라고 한다. 예브게니와 리자는 여행을 떠난다. 크림반도에서의 삶은 하루하루가 축제 같았다. 이전의 기억은 완전히 잊어지고 다시 경쾌하고 유쾌한 생활이 돌아왔다. 예전의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예브게니는 이제 전혀 새로운,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여행에서 돌아오고 나서도 모든 것이 그의 희망대로 이루어졌다. 아내는 순산했고 장모는 떠났고 그는 지방자치회에서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그 순간 스체파니다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녀를 마주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예브게니는 모든 것이 낯설고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절망했다. 자신은 어떤 짓을 해도 스체파니다를 향한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직면한 것이다.
‘그 여자는 악마야. 진짜 악마라구. 그 여자는 내 의지와는 반대로 온통 나를 사로잡고 뒤흔들고 있어. 죽여버려? 그래. 오로지 두 가지 선택밖에 없어. 아내를 죽이든가 그 여자를 죽이는 방법. 더 이상 이렇게 살 순 없잖아. (...) 저녁 어스름이 되면 그녀의 집 뒤뜰로 달려갈 거야. 그 사실을 안 그녀가 내게로 올 것이고. 드디어 마을 사람들이 알고 아내에게 일러바치거나 어쩌면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내 성격에 스스로 아내에게 털어놓을지도 몰라. 파라샤, 대장장이, 사람들 전부 알게 되겠지. 과연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걸까? 안 돼. 오로지 두 가지 탈출구밖에 없어. 아내를 죽이든가 그녀를 죽이든가. 그리고 또... 아 그래, 세 번째 방법이 있지. 나 자신 – 나지막이 소곤대다가 불현 듯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 자살하는 거야. 그러면 두 사람을 죽일 필요도 없잖아.’
이 소설은 특이하게도 두 개의 결말을 갖고 있다. 첫 번째 결말에서 예브게니는 리볼버를 꺼내 자신의 관자놀이에 당긴다. 두 번째 결말에서는 리볼버를 들고 스체파니다를 찾아가 그녀를 쏴버린다. 두 결말에서 모두 예브게니는 정신병 판정을 받는다. 두 결말은 같은 문단으로 끝을 맺는다.
실제로 만일 예브게니 이르체네프가 정신병력자였다면 다른 모든 사람들 역시 정신병자인 셈이다. 진짜로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 의심할 여지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발견하는 광기의 징후를 자신에게서는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푸코의 <광기의 역사> 생각나는 대목이다.
누가 비정상인가? 누가 미쳤는가? 이런 질문보다 의미 없는 질문도 없다. 누구나 비정상이고 누구나 미쳤기 때문이다. “어떻게 광기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이것이 중요한 질문이다. – 황진규『틈을 내는 철학책』
스체파니다에 대한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결국 ‘내가 죽거나 아니면 네가 죽거나’의 길 끝에서 파멸해버린 예브게니. 누군가에게는 그의 선택이 너무 극단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아니, 그게 자살이나 살인을 해야될 정도로 심각한 일이야? 그냥 지나가면 될 일을 주인공이 혼자 너무 오버한 거 아니야?’ 실제로 이 소설을 주인공의 방탕한 생활에 대한 인과응보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이 소설은 욕망에 대한 이야기이다. 삶에 갑자기 들이닥치는 무자비한 욕망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욕망을 따르지 않았을 때 삶에 어떤 형벌이 내려지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톨스토이는 스체파니다를 ‘욕망’으로, 그리고 그 욕망의 거세를 ‘죽음’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브게니는 욕망을 따랐어야 한다. 욕망인 스체파니다의 곁에 갔어야 한다. 그러지 못했기에 그의 삶은 죽어갔다. 욕망을 외면했기에 그의 삶은 죽어갔고, 어떤 수를 써도 그 욕망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는 걸 직감했을 때 그는 욕망을 저주했다. “그녀는 악마야.” 욕망을 저주했기에 그는 욕망을 없애버릴 수밖에 없었다. 욕망하는 그녀를 죽이거나, 욕망하는 자신을 죽여야 했다. 아니면 그를 욕망할 수 없게 만드는 세상을 죽여야 했다. 이 소설에 세 번째 결말, 즉 아내와 장모를 죽이는 결말은 없다. 예브게니는 알고 있었던 것 아닐까. 아내는 세상의 상징일 뿐이라는 걸. 리자를 죽인들, 그는 스체파니다의 곁에 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를 가로막는 것은 ‘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를 가로막는 것은 세상의 시선이다. 그는 세상의 시선을 넘을 자신이 없다. 그래서 욕망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죽은 채로 사느니, 죽어버리거나 죽여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나는 이 마음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이것은 ‘소심함’이다.
어린 시절부터 난 항상 자유롭고 싶었다. 청소년기에는 나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세상을 저주했다. 내가 처한 환경과 조건을 저주했기에 없애버리고 싶었다. 어른이 되고 나에게는 표면적으로 자유가 주어졌다. 하지만 나는 자유를 향해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 시간이 지속되자 나는 자유를 저주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유를 외면했다. 스체파니다를 향한 끌림 같은 것은 한 순간의 감정이며, 그런 것쯤은 일에 몰두하면, 크림 반도에 여행을 갔다 오면, 또 리자가 출산을 하면 다 잊혀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체파니다는 자꾸만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어느 순간 이 욕망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렇다고 스체파니다의 곁에 용감하게 가지도 못했다. 그때부터나의 죽은 삶이 시작되었다. 나는 리볼버를 만지작 거렸다. 리자를 죽일 수도, 스체파니다를 죽일 수도 없다면 나를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욕망은 ‘죽음’과 ‘죽음’ 사이의 길을 걸어갈 때만 숨을 쉴 수 있다.
예브게니는 어떻게 살았어야 할까? 리자를 죽이지도, 스체파니다를 죽이지도, 그리고 자신을 죽이지도 않았어야 한다. 그가 죽였어야 할 것은 자신의 과거의 삶 뿐이다. “모든 것이 순탄하고 기분 좋게 흘러가던”, 모든 이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던 바로 그 삶. 그 삶만 죽였다면 그 누구도 죽일 필요가 없었다. 욕망을 따르는 삶이란 스체파니다의 죽음, 예브게니의 죽음, 리자의 죽음 사이에 난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스체파니다(욕망)를 없애고 싶은 충동, 리자(환경)을 없애고 싶은 충동, 그리고 자신(주체)을 없애고 싶은 충동이 불러일으키는 그 팽팽한 긴장감을 견뎌내며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한발자국씩 걸어가는 삶. 어쩌면 스체파니다를 향한 욕망이 진정한 사랑인지 아닌지를 묻는 것조차 쓸데 없는 질문일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그가 욕망-환경-주체 사이에서 균형을 잡은 채 자신의 삶을 살아나갈 수 있냐는 것이다. 예브게니가 스체파니다의 곁에 갔다고 한들 스체파니다와의 달콤한 시간도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그 시간이 끝난 뒤 그는 다시 혼자가 될 것이다. 그때는 스체파니다도 리자도 없고, 과거의 안락했던 삶 또한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브게니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욕망과 환경, 주체 사이의 긴장을 견뎌내며 한걸음을 걸어냈던 경험. 그 경험 속에서 온몸에 새겨진 힘과 균형감각 뿐이다. 온몸에 새겨진 그 감각이 예브게니의 삶을 구원할 테다. 어쩌면 예브게니가 진정한 사랑을 만나는 건 그 뒤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걸을 수 있게 된 그 다음.
<악마>는 톨스토이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총각 시절 4년을 만났던 정부와 결혼 후에도 밀회를 이어나가며 아내와 갈등을 빚었다. 이 <악마>라는 소설 뒤에 톨스토이는 <결혼>이라는 소설을 썼다. 이토록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써내려간 소설가라니. 난 톨스토이가 좋다. 난 ‘리얼’한 사람이 좋다. ‘리얼’한 것을 ‘리얼’하게 보여주는 사람이 좋다. 내 삶의 ‘리얼리티’를 다시 꼭 붙잡아야겠다. 나는 ‘리얼’한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