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왜 학생운동 그만뒀어?”
“경찰이 잡으러 와서 도망갔는데 한 달 동안 경찰이 집에 죽치고 있더라. 할아버지한테 미안해서 더 이상 못하겠었어.“
오래 전 아버지와 나눈 대화가 가슴에 남았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니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아버지는 학생운동을 했다. 박정희 시대 때. 갓 대학에 입학한 스물 몇 살의 앳된 청년이었을 테다. 자세한 이야기는 잘 모른다. 무서워서 잘 묻지 못했다. 아버지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것일까봐. 대학 시절에 학생운동을 했고, 꽤 주요 인물 중 하나였고, 수배가 붙었고, 경찰이 잡으러 와서 도망갔는데 경찰이 할아버지 댁에 잠복해 죽치고 있는 바람에 그만두게 되었다고 했다. 그 이후로 아버지는 군대에 강제징집을 당해서 남들보다 훨씬 힘들게 군 생활을 했고, 제대를 하고 나서도 소위 ‘빨간줄’이었기 때문에 아무데도 취직이 안돼서 절에 들어갔다가 일 년을 고민한 끝에 결국 맨땅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아버지의 청년 시절 이야기는 이런 모호한 이야기의 형태로 남아 있었다.
2024년 12월 3일. 이제 막 철학 수업이 끝나고 조금 느슨한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한 친구가 심각한 얼굴로 핸드폰을 들고 와서 스승에게 보여줬다. “쌤, 계엄이 선포되었다는데요?” 귀를 의심했다. 핸드폰으로 뉴스를 검색했다. 진짜였다. ‘계엄’이라는 단어가 지금 이 시대에 존재할 수 있는 단어인지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그런데 사실 내가 참석했었던 박근혜 탄핵 집회 때도 계엄령이 선포될 수 있다는 주장이 (매우 신빙성 있는 자료와 근거들과 함께) 제시된 적이 있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로 그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온몸이 얼어붙었다. 나는 계엄을 경험해본 세대가 아니지만 나의 아버지는 계엄을 온몸으로 경험한 사람이다. 아버지가 그간 했던 말들이 온몸을 휘감았다. 집에 와서 속보들을 보고 국회에 난입한 군인들의 모습까지 보자 이 모든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 체감되었다. 아버지 세대들도 이렇게 한 순간에 일상을 빼앗겼던 거구나.
아버지는 국가에 대한 불신이 심했다. 국가를 믿어서는 안된다는 말을 자주 했다. 이승만은 전쟁났을 때 피난 가는 국민을 보고도 지 살려고 한강 다리를 폭파시키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전쟁이든 뭐든 우리 목숨이 위험해지는 상황은 또 언제 올지 모르고, 그때 국가가 우릴 지켜줄 거라는 기대를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심지어 내가 어른이 되고나서는 비상시에 우리 가족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에 대한 프로토콜을 알려주기까지 했다. 그것도 아버지가 있을 때 없을 때, 화폐가 작동할 때 작동하지 않을 때, 교통이 끊겼을 때 안 끊겼을 때를 다 나눠서. 나는 아버지가 꽤나 유난스러운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아버지는 단지 국가에 배신 당한 ‘기억’이 있는 사람일 뿐이었다.
폭력의 힘은 언제나 강하다. 나는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긴다”고 믿는 사람이지만, 그것은 폭력조차 무력화시킬 수 있을 만큼 ‘강한 사랑’일 때만 그렇다. 폭력은 상식을 초월해있으며 자비가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상대를 쓸어버리겠다고 마음 먹은 이는 당연히 상대가 가장 방심하고 있는 부분부터 노릴 수밖에 없다. 무자비하지 않으면 폭력은 성립할 수 없고 폭력이 성립되는 순간 상식은 작동하지 않는다. 폭력이 무서운 이유는 그래서다. 최소한의 자비도 없고, 상식은 아득히 초월해 있기에.
윤석열이 조금 더 치밀하게 준비했다면 내란은 성공하지 않았을까. 그랬을 것이다. 국회의원들이 모이기 힘든 주말 새벽에 계엄을 선포했다면 군이 먼저 국회를 장악했을 수 있다. 아니면 윤석열의 군 장악력이 전두환만큼 강력하여 실제로 그날 군이 명령에 따라 무력으로 국회를 찬탈하려고 했어도 내란은 성공했을 것이다. 그 절차가 불법이고 아니고는 국회가 무력화되고 사법기관도 군의 통제(계엄시 재판은 군법회의가 관장한다고 알고 있다)를 받게 되는 순간 의미가 없어진다. 5.18 때 국가가 국민을 향해 총질을 했던 일은 불법 아니었나. 서구인들이 인디언을 절멸시킨 일은 부당한 일 아니었나. 합법성과 정당성, 그러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어!‘를 따지는 것은 자비와 상식이 작동하고 있을 때만 유효하다. 자비와 상식의 무너지는 순간 남는 것은 힘과 힘의 격돌 뿐이다. 어쩌면 니체가 말했듯, 세상은 정말 ‘힘의 의지’로 작동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국회에 군인들이 총을 들고 들어가는 장면을 보았다. 여의도 상공에 군 헬기가 뜬 장면을 보았다. 나는 여의도 바로 옆 영등포에 산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면 여의도까지 10분이면 가는 거리다. 여의도는 나의 일상의 공간이다. 한 달에 한두번씩 아버지와 점심 식사를 하는 곳이고, 날 좋은 날엔 엄마와 카페 데이트를 하는 곳이다. 친구와 벛꽃축제를 보러 갔던 곳이고, 마음이 어지러울 때 정처없이 걸었던 곳이다. 마라톤을 뛰었던 곳이고, 마라톤을 다 뛰고 친구들과 깔깔 웃으며 밥을 먹고 차를 마셨던 곳이다. 일상 공간이기에 국회 앞도 수십 번을 걸어서 오갔었다. 그 공간에 군과 시민들이 대치해 있었다. 한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지금 국회 앞으로 같이 가자고. 나는 지금 국회의원이 197명까지 모였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했다. 3명만 더 모이면 계엄이 해제될 것 같으니 조금만 더 상황을 지켜보자고.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계엄은 해제되었다. 그날 나는 국회 앞으로 뛰쳐나가야했던 걸까? 그날 나의 기다림이 비겁했던 것일지 아니면 신중했던 것일지는 계속 고민해봐야 할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그날 국회 앞으로 뛰어간 시민들 덕분에 계엄이 하루를 채 넘기지 않고 해제될 수 있었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나는 그날 국회를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싸웠던 시민들, 언론인들, 국회의원들과 그 보좌관들에게 빚을 진 게 맞다. 그 사실은 결코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국회의 상황을 계속 지켜보며, 무의식적으로 두 얼굴이 떠올랐다. 김어준 씨와 유시민 씨다. 그 순간 내가 공적인 인물 중에서 누구에게 정서적으로 의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김어준 씨는 체포조가 와서 도망친 상태였고, 김어준 씨가 이끄는 딴지방송국에는 흔히 ‘김어준 사단’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 생방송을 진행하고 있었다. 주진우 기자는 국회에서 군인들과 몸싸움을 벌이며 라이브를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알았다. 내가 가야 하는 길을. 나는 김어준 씨가 도망쳤을 때 딴지방송국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겠구나. 나는 지금처럼 혼란하고 불안한 상황에 집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겠구나. 나는 김어준 씨처럼 본인이 체포될 수도 있었던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도 웃음과 유머를 잃지 않는 사람은 되지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저 사람, 저 긴장하고 두려워보이고 여유도 없어보이지만, 김어준 씨가 부재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집을 지키려고 마이크를 켠 저 사람 정도는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김어준 씨의 딴지방송국은 그들만의 집이 아니니까. 그들은 나에게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공적인 ‘집’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
다음 날이 되었다. 유시민 씨가 공중파와 유튜브 방송을 가리지 않고 나와 현 정국에 대한 다양한 해설을 해주었다. 안심이 되었다. 고마웠다. 김어준 씨가 그날 체포될 뻔한 상황을 웃으며 이야기하자, 유시민 씨가 자기가 대학생 때 진짜 체포되어 2년 감옥에 있었던 이야기로 웃으며 응수하는 걸 듣고 고맙고 미안하고 가슴 한 구석이 뭉클했다. 유시민 씨의 인터뷰를 몇 개 보았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이야기하는 인터뷰였다. 유시민 씨는 아직도 노무현 대통령 이야기를 할 때는 어린 소년처럼 활짝 맑은 미소를 짓는다. “제가 아주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었죠. 그전에도 좋아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아주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어요.” 그 말이 무엇인지 너무 알 것 같았다.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은 종종 나타나지만 ‘아주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은 잘 나타나지 않는다. 유시민 씨는 자신이 ‘아주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얼마나 설레고 기뻤을까. 그리고 그 ‘아주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온갖 정치적 모욕과 살해를 당했을 때, 얼마나 화가 나고 고통스러웠을까. 심장이 도려내지는 느낌이었을 것 같다. 노무현 대통령 장례식 때 그 상처받은, 분노한, 피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적개심에 가득찬 유시민 작가의 눈빛이 떠올랐다. ‘아주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을 지키지 못한 기분은 무엇이었을까. 유시민 작가는 어떤 시간을 거쳐 지금 저렇게 여유롭고 단단한 목소리로 ‘국가과 권력자의 폭력’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걸까.
노 대통령이 퇴임 후 유시민 씨에게 “정치는 정치밖에 할 수 없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니 유시민 씨는 정치 말고 다른 역할을 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 말이 유시민 씨가 정계 은퇴를 할 때 얼마만큼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유시민 씨는 그후 정치의 세계가 아닌 자기만의 위치에서 공적인 ‘집’이 되었다. 책을 쓰고 논평을 하고 방송에 나와 어렵고 복잡해보이는 공적인 이야기들은 날이 갈수록 더 쉽고 간결한 언어들로 해설해주면서. 모두가 떠난 자리에 남아 자기만의 자리를 만들어 스스로가 공적인 ‘집’이 되어주고 있는 유시민 씨에게 고마웠다.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유시민 씨 인터뷰를 보며 어떤 한 부분에서 마음이 쿵 하고 내려 앉았다. 유시민 씨가 노 대통령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어본 게 딱 한번이라고 한다. 노 대통령은 평소에 고맙다, 미안하다 같은 말들을 낯간지러워서 잘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고 하는데, 딱 한번 유시민 씨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유시민 씨는 제가 가장 어려울 때 나를 지켜준 사람”이라고. 그 말을 듣는데 가슴이 철렁했다. 나는 내가 ‘아주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가장 어려울 때 그 사람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지 못했다. 나는 내가 힘든 것이 늘 가장 힘든 사람이었으니까. 유시민 씨는 그렇지 않았다. 나와 유시민 씨의 차이가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유시민 씨는 노 대통령을 만나기 전에도 스스로 싸워왔던 사람이다. 혼자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아주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어 함께 싸우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 싸워온 사람이 아니다. 나는 내가 해야하는 싸움을 하지 않았고, 미루고 외면해왔던 사람이다. 그래서 함께 싸우는 사람이 되어도 ‘아주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을 지킬 힘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함께 싸우지 않으면 혼자 싸울 힘이 없었으니까.
니체의 말이 옳다. 세상은 ‘힘의 의지’로 이루어져 있다. 기쁨의 영토는 아니 일상의 공간마저도 지킬 힘이 없으면 빼앗기는 것이다. 밀리면 잃는 것이다. 나의 소중한 일상의 공간이 무장한 군인들로 뒤덮히는 것을 보고 온몸으로 체감했다. 그리고 그 소중한 일상의 공간에 친구들과 함께 시위를 하러가서 다시 한번 온몸으로 체감했다. 이게 정치구나. 이게 ‘힘의 의지’구나. 나의 일상과 기쁨에, 우리의 일상과 기쁨에 ‘힘’이 밀고 들어온다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 뿐이다. 나의 일상과 기쁨, 우리의 일상과 기쁨을 지키기 위해 나 역시 ‘힘’으로 밀고 나가는 것. 나는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의 집을, 그리고 우리의 집을. 아버지가 왜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못한 채 삶을 살아올 수밖에 없었는지 알 것 같다. 아버지는 생물학적 ‘아버지’, 그리고 국가라는 ‘아버지’에게 두 번 배신당한 사람이니까. 아버지가 왜 그토록 가족을 지키려고 했는지도 알 것 같다. 나 역시 아버지처럼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다. 다만 조금 더 넓은 ‘가족’, 그러니까 조금 더 넓은 ‘우리’를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적인 ‘집’만이 아니라 공적인 ‘집’까지 짓고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것이 지금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여러 '집'들을 짓고 지켜온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염치일 것이다. 그것이 계엄이 나에게 알려준 나의 길이다. 고맙다, 석열아. 각성하게 해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