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고원』 (질 들뢰즈) 제1장 강독 후기
나는 미국에서 대학을 나왔다. 운 좋게 모두가 선망하는 학교를 다녔지만, 나의 유학 생활은 지옥 그 자체였다. 아직도 그 마음이 생생이 기억난다. 설렘과 기대를 가득 안고 비행기에서 내려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은 순간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알 수 없는 공포심이. 찝찝한 마음을 애써 누르고 학교에서 모든 행정 수속을 마치고 아무도 없는 기숙사 방에 홀로 남겨졌을 때, 그 공포심은 더욱 더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이민 가방 하나 들고 거대한 우주 속에 홀로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유학 생활 4년 내내 그 공포심에서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했다. 평생을 부모의 보호 아래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온 나에게, 타지에서 말도, 문화도, 피부색도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며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나가야 하는 상황이 얼마나 급격한 ‘차이’였겠는가. 마치 동물원에서 평생을 살다가 갑자기 자연에 방생된 동물처럼 나는 세상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수업 시간에는 늘 마음이 조마조마했고, 길에서 누군가가 말이라도 걸면 죄 지은 사람처럼 깜짝깜짝 놀라기 일쑤였다. 어쩔 수 없이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 상황이 오면 두려운 마음을 감추고자 시종일관 방글방글 웃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 끝에 남은 것은 ‘영문도 모른 채 맨날 웃는 바보'라는 별명 뿐이었다.
그런 일이 반복될수록 나는 점점 더 기숙사 방에 틀어박혔다. 수업을 듣거나 몇몇 한국 친구들을 만날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방 밖에 나가질 않았다. 기숙사 방에 혼자 있을 때는 보지도 않으면서 늘 노트북에 ‘무한도전’을 켜 놨다. 유재석과 노홍철이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에 위안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처럼 유학 온 아이들 중 방에 한국 가요나 방송을 배경음처럼 틀어놓는 친구들이 꽤 있었다. 그들에게 이유를 물으면 조용하면 더 외로워서 그런다고 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혼자 있는 방에 소리마저 나지 않으면 거대한 적막 속으로 빨려 들어가버릴 것 같으니까. 어딜 가도 ‘외국어’만 들리는 곳에서 ‘모국어’는 소리만으로도 어떤 익숙한 안정감을 주었다. 지독히도 외로웠던 유학 생활 내내, 나는 기숙사 방에 작은 ‘한국’을 만들어놓고 살았다. ‘무한도전’의 소음이 타지에서 나를 지켜주는 유일한 ‘집'이었다.
들뢰즈를 공부하면서 내가 유학 시절에 느꼈던 거대한 공포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들뢰즈는 세상은 ‘차이’로 득실대는 곳이라고 한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아니다. 꽃과 나무는 다르고, 나무와 풀도 다르다. 꽃이라는 종 안에서도 진달래와 개나리는 다르고, 개나리와 해바라기도 다르다. 심지어 같은 줄기에서 자란 진달래도 개체별로 미묘하게 색과 향과 모양이 다 다르다. 가을에 바닥에 수북히 쌓여 있는 낙엽을 보면 어느 하나 똑같은 빛깔을 띠고 있는 것이 없다. 어제의 노을빛과 오늘의 노을빛도, 오늘의 구름 모양과 내일의 구름 모양도 다르다. 나와 너는 다르고,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도 다르다. 들뢰즈에게 세상은 ‘차이’ 그 자체다.
하지만 나는 들뢰즈처럼 세상을 봐 오지 않았다. 세상이 ‘차이’인데, 나는 ‘차이’를 불편해하고 무서워했다. 그 말은 나는 ‘세상’을 불편해하고 무서워했다는 말과 다름없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나는 나와 다른 사람들이 싫었다. 나와 다르기에 그들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심지어 나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별로 마주칠 일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 온실 속의 화초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나?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변화무쌍한 환경이 아닌,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있는, 즉 별다른 변화 없는 환경에서 자라왔다는 뜻 아닌가. 나는 유학 가기 전까지 평생을 ‘대치동’이라는 한 동네에서 자랐다. 비슷한 소득 수준, 비슷한 직업, 비슷한 학력, 비슷한 가족 형태를 지닌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 그렇게 비슷한 사람들 속에서 평탄하게 살았으니 ‘차이’를 경험해 본 적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경험해보지 않은 것을 두려워한다고 했나. 나는 ‘차이’를 두려워하는 연약하디 연약한 상태로 유학을 가서, 느닷없이 나와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음식을 먹고 다른 문화에서 자란 존재들 속에 내던져졌다. 그래서 그 극단적인 차이가 야기하는 혼란함과 두려움을 감당하지 못했던 게다. 내가 유학 첫날 기숙사에 앉아 홀로 우주에 남겨진 느낌이 들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카오스는 거대한 검은 구멍으로 변하기도 하는데, 이때 사람들은 내부의 중심에 불안정한 하나의 점을 찍으려고 한다. 다른 때는 하나의 점 주변에 고요하고 안정된 “외관”을 만들어낸다. 이에 따라 이 검은 구멍은 자기 집으로 변하게 된다." 질 들뢰즈 「천 개의 고원」
“그것은 일종의 소리 벽이며 적어도 벽의 일부는 소리적인 것이다. 한 아이가 학교 숙제를 하기 위해 힘을 집중시키려고 작은 목소리로 흥얼거린다. 한 주부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라디오를 켜놓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하는 동안 카오스에 저항하는 힘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은 모든 가정에서 일종의 소리 벽으로서 영역을 표시한다.” 질 들뢰즈 「천 개의 고원」
차이로 득실대는 카오스, 모든 것이 이질적인 혼돈 속에서 나는 점을 찍고 집을 지으려고 애를 썼다. 들뢰즈는 소리가 일종의 벽 역할을 한다고 했다. 이 문장을 읽고 유학 시절 내가 방에서 끊임없이 ‘무한도전’을 재생해놨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게 카오스에 대항하기 위해 소리로 벽을 만드는 행위였다니. 사실 나에게 ‘무한도전’을 무한 재생했던 기억은 그다지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유학 생활이 끝난 뒤에도 꽤 긴 시간 동안 어두운 방에서 노트북을 켜면, 노트북의 파란 불빛이 그때의 외로움을 떠올리게 해 싫어했다. 그런데 들뢰즈의 이야기를 들으니 내가 그 당시 ‘무한도전’이라도 켜놔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리로 만든 집’이 없었다면 진짜로 거대한 카오스에 빨려 들어가 버렸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사실 유학생 중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극심한 정신병을 얻은 친구들이 몇몇 있었다. 다른 학교의 누가 자살을 했다는 소식도 유학생 커뮤니티에서 심심찮게 들리곤 했다. 그들은 마지막 ‘집’마저 없었던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소리로 ‘집’을 만드는 행위는 일상생활 속에서도 자주 일어난다. 나는 지하철을 타면 이어폰을 꽂는다. 득실거리는 타인들 사이에서 나만의 안정적인 공간을 마련하고 싶기 때문이다. 반대로 나의 안정적인 공간에 타인의 소리가 뚫고 들어오면 마치 내 영역을 침범 당한 것처럼 불쾌감이 든다. 대표적으로 층간소음이 그럴 테다. 하지만 들뢰즈가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 동안 풀리지 않는 어떤 답답함이 있었다. 내가 무한도전이 내는 소리로 만든 공간은 ‘집’보다는 ‘피난처’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집’과 ‘피난처’는 안정감을 주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한 가지 큰 차이가 있다. ‘집’은 자유롭게 안팎을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인 반면, '피난처'는 안에 갇히는 공간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피난처'는 바깥 세상에서 밀려나고 밀려나 마지막 순간에 만든 최후의 보루다. 내 기숙사 방이 정확히 그랬다. 나는 차이로 득실대는 바깥 세상이 전쟁통처럼 여겨진 탓에 그 방에 스스로 갇혔다. 그 '피난처'에서 고향의 흔적들을 부여 쥐고 겨우겨우 존재를 유지했지만, 모든 히키코모리들이 그렇듯이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방 안에서 점점 작아지고 시들해졌다.
왜 어떤 소리는 ‘피난처’ 밖에 만들지 못하고, 어떤 소리는 ‘집’을 만드는 것일까? 한 동안 고민하다가 다시 들뢰즈에게서 답을 찾았다. 들뢰즈는 새들은 노래를 반복해서 지저귐으로서 자기 영토를 나타낸다고 했다. 나는 세상이 무서워서 억지스럽게 모국어 소음을 들으며 겨우 안정감을 찾았다면, 새들은 세상 앞에서 당당하게 자기 노래를 부르며 자기 영토를 표시해온 것이다. 그래서 내가 소리로 만든 공간은 ‘피난처’ 밖에 되지 않았던 반면, 새가 소리로 만든 공간은 ‘나만의 영토’, 즉 ‘집’이 되었던 게다. 모르긴 몰라도, 새는 그 영토 안에서 결코 작아지거나 시들시들해지지 않을 테다. 새 또한 자기 영토에서 안정감을 느낄 테지만, 그곳에 갇히지는 않을 테다. 오후가 되면 다른 나뭇가지에 앉아 또 다른 노래를 부르며 또 다른 영토를 구축할 테니까. 소리를 듣는 것과 소리를 내는 것의 차이. 전자는 세상에서 밀려나 남는 자리에 겨우 숨 쉴 공간 하나 마련하는 것이고, 후자는 세상 속에서 내가 원하는 곳에 내 공간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는 수동적인 삶과 능동적인 삶만큼 큰 차이이지 않을까.
“표현하고 살아라.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나에게 철학과 글쓰기를 가르치는 스승이 자주 하는 말이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작은 의문이 들곤 했다. 표현하는 즐거움을 알기에 일단 수긍했지만, 왜 ‘표현하는 것’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다. 하지만 이제는 알겠다. 인간에게 '표현하는 것'은 새에게 '지저귀는 것'과 같다는 뜻이었다. 새가 노래를 반복하며 자신만의 영토를 표시하듯, 인간 또한 표현을 반복하며 자신만의 영토를 표시해야 한다. 새처럼 매일 부르는 노래. 물론 인간에게 그 노래는 글이 될 수도, 그림이 될 수도, 영화가 될 수도 있으리라. 그 매일 부르는 노래들이 모여 곧 나만의 영토, 나의 집이 된다. 차이로 득실대는 무서운 세상 속에서 나를 지켜줄 뿐만 아니라, 다시 세상으로 나설 힘을 주는 집말이다.
유학을 마치고 스타트업을 창업했다가 우울증에 걸렸다. 그때는 아무리 무한도전을 봐도 어떠한 안정감을 느낄 수 없었다. 세상에 밀리고 밀려 한 줌의 먼지처럼 소멸해버릴 것 같을 때, 철학과 글쓰기를 만났다. 그때부터 2년 남짓한 시간동안 ‘철학흥신소’라는 인문학 공동체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글을 썼다. 그 ‘집’에서 인공호흡기를 달고 겨우 살아나 혹독하게 자기 성찰과 삶의 공부를 반복하며 이제는 몸도 마음도 제법 건강해졌다. 그래서인지 이제 세상에 나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피난처도 집도 아닌 차이로 우글대는 진짜 세상 말이다. 나와 다른 이들을 만나고, 나와 다른 삶, 다른 생각들을 만나고 싶다. 하지만 그런 마음과 동시에 여전히 세상에 대한 두려움도 든다. 이것이 나의 초행길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번엔 원을 반쯤 열었다가 활짝 열어 (...) 누군가를 부르거나 혹은 스스로 밖으로 나가거나 뛰어나가 본다. (...) 일단 달려들어 한번 시도해 보는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자신을 세계에 던져 이 세계와 혼연일체가 되어야 한다. 속삭이는 노랫소리에 몸을 맡기고 자기 집밖으로 나서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평범한 한 아이의 통상적인 여정을 나타내는 운동이나 동작, 음향의 선 위해서 ‘방황의 선’이 생겨나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고리, 매듭, 속도, 운동, 동작과 음향이 나타난다.” 질 들뢰즈 「천 개의 고원」
처음 가보는 길을 갈 때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노래를 흥얼거린다. 마치 새들의 지저귐처럼, 속삭이는 노래 소리로 작은 집을 만들어 그 속에 몸을 맡긴 채 집 밖을 나서는 것이다. 나에게 그 ‘노래 소리’는 글일 것이다. 오늘 쓰는 글, 내일 쓰는 글, 모레 쓰는 글. 매일 매일 ‘글’이라는 형식으로 내가 부르는 노래. 그렇게 매일 노래를 부르며 세상 속으로 모험을 떠나고자 한다. 이 글이 나의 첫 번째 노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