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소비자의 니즈를 파악하는 방법은?
어김없이 그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찬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기 시작하면, 광화문의 대형 서점 매대와 우리 사무실의 책상 위에는 약속이라도 한 듯 형형색색의 띠지를 두른 책들이 쌓이기 시작합니다. 바로 『트렌드』를 전망하는 각종 도서들이다.
올해도 상사의 지침에 따라 각 부서가 이 책을 읽고 리뷰하는 시간을 가졌다. 회의실에 모여 각자가 해석한 내년의 키워드를 공유하고,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어떤 거대한 파도가 우리에게 밀려오는가"를 치열하게 논의했다. 조직이 외부의 흐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도태되지 않기 위해 민첩하게 움직인다는 사실은 분명 고무적인 일이다.
하지만 열띤 토론이 오가는 회의실 한구석에서, 문득 기이한 생각이 든다. 빼곡히 적힌 10개의 키워드가 마치 내년의 정답지라도 되는 양 밑줄을 긋고 외우는 이 풍경이, 과연 소비자의 마음을 읽는 가장 온당한 방법일까 하는 의문이 솟아올랐기 때문이다.
시선을 잠시 밖으로 돌려보면 흥미롭게도 연말에 전 국민이 '내년의 트렌드'를 예습하는 풍경은 유독 한국에서만 두드러지는 기현상이다.
미국의 연말 서점가는 트렌드 예측서 대신, 한 해 동안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쟁점을 깊이 있게 해설한 논픽션이나, 시대의 감정을 어루만지는 소설, 혹은 거장의 회고록이 베스트셀러를 장식한다.
2025년 11월, 파이낸셜타임스에서 선정한 베스트셀러 도서는 AI 패권 경쟁을 다룬 책을 읽으며 기술의 본질을 탐구했고, 파타고니아 창업 이본 쉬나드의 전기를 읽으며 단순한 성공스토리가 아닌 다. 유럽의 독자들 역시 자본주의의 한계와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책이 선정된다. 지나온 시간을 복기하며 사회가 어디로 흘러왔는지, 그 맥락을 이해하는 데 연말의 시간을 할애한다. 그들에게 12월은 미래를 점치는 시간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깊이 응시하는 시간인 셈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유독 '내년'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 사회가 가진 속도와 불안 때문일 것이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도태될지 모른다는 공포, 남들은 다 아는 키워드를 나만 모르면 무능력해 보일 수 있다는 사회적 압박이 우리를 서점으로 이끈다. 그래서 한국의 트렌드서는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불안한 직장인들에게 "이것만 알면 뒤처지지 않는다"는 안도감을 파는 일종의 '심리적 보험' 상품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트렌드서는 복잡한 세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는 훌륭한 나침반이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치명적인 함정이 있다. 바로 '평균의 오류'이다.
책은 이해를 돕기 위해 수천만 명의 소비자를 'MZ세대' 혹은 '잘파세대'라는 하나의 단어로 묶고, 그들의 두드러진 특징을 몇 가지 키워드로 요약한다. 하지만 통계학적 평균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 평균값에 정확히 들어맞는 개인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MZ'라고 퉁쳐서 부르는 거대한 집단 안에는, 트렌드를 쫓아 듀프 상품을 찾아 공유하는 20대도 있지만, 반대로 유행에 극심한 피로감을 느껴 촌스럽고 오래된 것을 찾아 떠나는 20대도 있으며, 아예 소비 자체를 죄악시하며 무지출 챌린지를 하는 20대도 혼재되어 있다.
트렌드서가 제시하는 '평균적인 소비자'는 현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유령과 같을 수도 있다. 우리가 책 속의 키워드에 매몰될 때, 고객은 살아 숨 쉬는 입체적인 '개인'이 아니라 납작한 '활자'가 되어버린다. "요즘 애들은 옴니보어 소비를 한대"라는 섣부른 일반화는, 정작 우리 브랜드가 집중해야 할 '트렌드를 따르지 않는 진짜 고객'의 목소리를 소음으로 치부하게 만들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책을 덮고 우리는 어디를 보아야 할까요? 저는 그 답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서비스 안에, 그리고 고객이 남긴 무수한 흔적 속에 있다고 믿는다.
소비자의 니즈는 트렌드라는 거창한 이름보다는 훨씬 더 구체적이고 사소한 행동으로 드러난다. 누군가는 메뉴정보를 디테일하게 영양성분 따져가며 식사를 선택하고, 누군가는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날 헬시데이 메뉴를 항상 선택하다가 자극적인 메뉴를 선택하게 되며, 누군가는 이벤트 홍보는 기가 막히게 챙기면서도 정작 식사는 다른 곳에서 한다.
이러한 선택의 맥락, 고객의 페르소나, 그리고 무엇보다 고객이 '하지 않은 행동(회피)'을 관찰하는 것이야말로 100권의 트렌드서보다 정확한 통찰을 줍니다. 메뉴를 추천받았지만 클릭하지 않는 0.1초의 망설임, 추천순 추천받은 메뉴보다 항상 단백질 높은 순만 보고 싶어 하며, 설문조사 창을 황급히 닫아버리는 그 마음속에 진짜 욕망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당사에서 직접 운영하는 소셜 채널이나 검색 기능은 없지만 인스타그램 및 구글 및 네이버 검색 데이터는 고객의 감정 온도를 가장 예민하게 보여주는 온도계이다. 트렌드 도서가 "건강 지능"이 선정되기 훨씬 이전부터, 검색창에는 '제로 슈거', '혈당 스파이크' 같은 단어들이 사람들의 불안을 타고 급증하고 있었다.
우리가 매일 들여다보는 그 지루한 엑셀 파일과 로그 데이터 속에, 이미 세상의 변화는 예고되어 있는 것이다.
현업에서 고객 데이터를 집요하게 파고들다가 뒤늦게 트렌드 도서를 펼쳐본 적이 있다. 그때 느꼈던 감정은 놀라움보다는 묘한 안도감이 생겼다. 책에 적힌 그 멋진 문장들은 전혀 낯선 예언이 아니라, 이미 우리 고객들이 행동으로 보여주었던 흐름을 세련된 언어로 재포장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또는 어떤 부분은 당사의 정체성이나 사업의 특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그 순간 저는 깨닫는다. 트렌드 책은 미래를 비추는 마법 구슬이 아니라, 우리가 현장에서 땀 흘려 발견한 것들을 사실 확인해 주는 참고서일 뿐이라는 사실을....
2026년 사업 계획 고민하는 지금, 우리 팀에게 트렌드의 페이지 번호 대신 "어제 당신이 만난 고객의 표정"에 대해 묻고 싶다.
남들이 요약해 준 정답지를 외우는 조직이 아니라, 눈앞에 살아 움직이는 고객의 행동을 관찰하고 그 이면에 숨겨진 맥락을 데이터로 읽어내는 조직. 평균을 쫓기보다 '진짜'를 보려 애쓰는 태도만이, 불확실한 미래를 뚫고 나가는 가장 확실한 무기가 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결국, 숲을 헤쳐 나가는 건 누군가가 그려준 지도가 아니라, 지금 내 발밑을 비추는 희미하지만 또렷한 등불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