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보며 강태공처럼 앉아서 고기가 낚이기를 기다려. 그러다가 딱 잡히지? 그럼 그걸 그 자리에서 회로 떠먹는 거야. 완전 맛있겠지! 다음 일요일에 가족끼리 다 같이 가자고.”
친구가 일일여행 겸 바다낚시를 제안했다. 당일치기라 피곤하긴 하겠지만 그간 아파트 숲 속에서 사느라 답답하기도 했고 바다낚시를 해보는 것도 괜찮은 경험일 것 같았다. 일요일 새벽, 잠에 겨운 눈을 비비며 길을 나섰고 텅 빈 고속도로를 몇 시간 달리자 탁 트인 바다가 나타났다.
바다 낚시터 팻말이 쓰인 곳에서 우리는 작은 쪽배를 타고 해안가를 벗어나 바다 안에 있는 낚시터로 들어갔다. 낚시터 관리인이 낚시구역을 알려 주었는데 친구 가족도 우리 가족도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이라 어리둥절하고 신기했다. 어른들은 바다 낚시터에, 아이들은 거기서 좀 떨어진 가두리 낚시터에 터를 잡았다. 바다낚시는 온종일 기다려도 물고기가 걸리는 일이 드무니 가두리 낚시터에서 점심거리를 보충하는 것이라고 친구가 설명했다.
찌는 꿈쩍거릴 낌새가 전혀 없었고, 역시나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이 세상사라며 몸을 배배 꼴 즈음이었다. “와!”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다. 가두리 낚시터에서 연거푸 몇 마리를 잡아 올린 것인지 신난 음성과 얼핏 박수 소리도 계속됐다. 친구와 나는 서둘러 그곳으로 갔다.
낚시터 난간 위로 살짝 놓인 그물체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아직 숨을 붙잡고 있는 물고기들이 그 안에서 몸을 틀며 뒤엉켜 있었다. 안쓰럽고 가여웠다. 회를 먹겠다고 바다에 온 주제에 왜 그런 가당치 않은 마음이던지. 친구도 그랬는지 비늘이 마르면 괴로울 거라며 죽을 때 죽더라도 죽기 전까지는 편하게 해 주자고 그물체를 물속 깊숙이 담가 주었다. 친구의 마음 씀씀이가 참 곱다 싶다 생각하다가도 그런 얄팍한 자비를 베풀 거면 아예 잡지를 말지 했다. 사람이란 참, 양면적이다.
점심때가 되자 관리인이 가두리 낚시터의 그물을 모두 끌어올렸고 우리는 운 좋게 열 마리를 배분받았다. 총 열세 마리의 물고기가 낚시터의 나무판 위에 던져졌다. 마치 바다로 다시 돌아갈 것처럼 퍼덕이다 곧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잠시 꿈틀대다 물고기들은 그렇게 잠잠히 죽은 생선이 되어갔다. 큰 양식장에 있다가 작은 가두리로 옮겨졌을 때, 그들은 알았을까.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는 것을.
그 열세 마리의 생선들은 빨간 초고추장과 푸른 상추 깻잎이 조화를 이룬 식탁의 메인이 되었다. 조금 전까지 품고 있던 생명력을 입증하듯 그들은 마트에서 파는 생선과는 질이 달랐다. 얇게 회 뜨인 살이 반지르르 윤기가 흘렀고 탱글탱글 탄력적이었다. 그 살들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고 머리, 꼬리, 지느러미 등 회가 되지 못한 잔해들만 덩그러니 남았다. 먹을 수도 버릴 수도 없었다. 대파와 고춧가루만 넣고 푹 끓여도 얼큰한 매운탕이 되겠건만 그곳에는 아쉽게도 가스불도 냄비도 없었다.
오래전 린과의 저녁 식사가 떠올랐다. 추수감사절이었다. 미국에서 온 파란 눈의 그녀가 샐러드와 허니머스터드를 곁들인 구운 닭고기를 준비했다며 나를 자기 집으로 불렀다. 열심히 먹었으나 배가 작은 우리 둘이 먹기에는 음식이 너무 많았다. 린이 근처에 사는 지인에게 전화를 했다. 닭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려는 의지였다. 생명이란 절대로 함부로 버려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으니 누구에게라도 좋으니 남은 닭을 전부 먹어줘야 했다. 좋은 것은 나누어 먹으라는 말도 음식을 남기면 아깝다는 말도 흔히 들어왔지만, 동물의 생명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는 처음이었다.
린은 어릴 때부터 엄마에게 항상 듣던 말이라며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먹고살기 위해 다른 생명을 죽이게 된다면 감사와 사죄의 마음을 지녀야 하고 반드시 남김없이 다 먹어야 한다고. 그래야 죽은 생명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는 거라고 말이다. 또한 인간이 생존을 위해 고기를 꼭 먹어야 한다면, 큰 것을 택해 가능한 한 살생을 줄이도록 노력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러니까 기왕 먹으려면 멸치나 메추리보다는 참치나 소를 먹는 편이 더 좋다는 말이다.
우리는 어떤 음식이 좋고 어떤 음식이 나쁜지에 대해 말하다,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요리로 샥스핀을 꼽았다. 상어를 지느러미만 쏙 잘라내 요리에 사용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바다에 던져버리는 그 요리. 아무리 상어라고 해도 그 생명은 얼마나 허무한가. 또 죽는 순간까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것은 인간의 이기심과 잔인한 면을 여지없이 증명해 주는 요리다.
낚시터에 남긴 열세 마리 물고기의 잔해는 나에겐 큰 짐이었다.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다면 생명의 일부를 무의미하게 죽이게 되니 분명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었다. 관리인에게 문의하자 다행히 동네 아주머니가 와서 남은 생선을 싹 쓸어 양동이에 담아 갔다. 그제야 나는 죽은 생명에 대해 예의를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 물고기들도 자신의 육체가 누군가를 위해 남김없이 쓰였음을 알고 조금이나마 위안이 받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 자체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알량한 배려일까.
낚시터에서 그것도 회를 먹으면서 무슨 생명의식과 예의인지 좀 어이없기도 했지만, 그래도 나름 진심이었다. 건강히 살자면 안 먹을 수는 없고 그렇다고 먹자니 미안하고. 영원히 순환하는 굴레에 빠져버린 딜레마 같았다. 그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감사하며 맛있게 전부 잘 먹는 것뿐이었다.
(오래전, 하늘이 맑았던 서해바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