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서 전깃줄을 별로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살았던 지역은 지중화 작업이 이루어졌고, 어린 시절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면 골목이든 뒷산이든 전깃줄이야 있었겠지만 연날리기를 하지 않는 이상 그런 것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전깃줄을 처음으로 인지한 것은 결혼 후 도쿄로 이사 간 직후였다. 서울의 직장을 그만두었기에 처음으로 한낮에 어슬렁거릴 수 있는 여유를 지니게 된 때이기도 했다. 시장에서 고로케를 사려고 줄을 서 있다가 우연히 하늘을 봤다. 전깃줄이 가게 간판들과 나뭇가지, 나뭇잎들과 한데 얽혀 있었고, 심지어 전깃줄 위로는 시꺼먼 까마귀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라 도쿄의 하늘이란 전깃줄에 의해 자잘히 잘린 그 모양새가 마치 조각피자 같았다.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라더니만 어째 하늘도 작게 만들어서 내 속을 답답케 하나, 그런 느낌이었다. 말하자면 전깃줄이란 풍경을 가리는 쓰잘데기 없는 방해요소였던 것이다.
전깃줄을 다시금 눈여겨본 것은 캐나다 여행을 할 때였다. 산으로 향하는 길에 맑은 호수를 보았다. 물이 어찌나 투명하던지 속으로는 작은 돌들이 보였고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이 비쳤다. 그 호수 주변을 따라 들어가니 집들이 있었다. 집들 주변으로 전봇대도, 전깃줄도 있었는데 왠지 도쿄와는 느낌이 달랐다. 누가 던졌는지 전깃줄 위로는 운동화 한 짝이 걸려 있었는데, 그 또한 재미있었을 뿐 볼썽사납지 않았다. 먼 배경으로 서있는 산 덕분이었을까. 전깃줄이 하늘을 갈라놓았다는 인상보다는 그저 호수와 산과 하늘이 한데 어우러진 풍경의 일부로 느껴졌다. 역시 자연이란 뭐든 다 품어내는 재주가 있는 것일까.
이후로는 전깃줄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 오후였다. 우연히 낯선 주택가에 가게 되었는데, 골목길을 걷다가 몽실몽실한 솜구름이 떠있는 하늘 위에 전깃줄이 몇 가닥 얽기섥기 걸린 것이 보였다. 마침 어느 집에선가 식사 준비를 하는지 맛있는 냄새도 솔솔 올라오고 아이들 소리와 텔레비전 소리도 들려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호수도 산도 없는 그 작은 골목의 전깃줄과 조각하늘이 전혀 흉물스럽지 않았고, 그저 환한 전등 아래에서 따뜻한 밥을 먹으며 떠들고 있는 가족의 모습이 떠올라 흐뭇했다. 전깃줄이 우리의 일상을 위한 의미 있는 존재로 인식된 것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주로 예쁜 것, 아름다운 것을 좋아했다. 산과 바다를 보러 가고 미술관을 찾으며 그런 것들을 누리고자 했다. 그런데 이제와 생각해 보면, 기본적인 삶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아름다운 것의 가치를 느낄 수 있을까 싶다. 하늘에 떠있는 전깃줄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전깃줄이 없다면 제때 밥을 먹고 제때 잠을 자는 평범한 일상이 가능할까. 평범한 일상이 사라지면 아마도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찬미할 수 있는 이도 사라질 것이다.
이렇게 생각은 꼬리를 물어, 한 대상의 외형만을 보고 ‘흉하다’고 말하는 일은 그만두어야 할 것 같았다. 멋진 풍경과는 동떨어진 보잘것없는 전깃줄일지라도 아름다움을 위해 일조한다면 그 역시 아름다운 것일 테니까.
집에 돌아와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았다. 해 질 녘 하늘과 전깃줄을 곰곰이 바라봐서인지 내 얼굴에서도 하늘을 가르던 그 전깃줄의 잔상이 보였다. 무언가 그리워 생긴 한숨 협찬의 미간 주름, 무언가 만날 수 있어 생긴 기쁨의 눈가 주름, 그리고 중력의 법칙을 여실히 드러내는 입가 주름. 모두가 세월의 흔적이요, 나의 살아온 증거였다. 솔직히 말해 예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깃줄조차도 달리 바라보게 된 지금, 내 얼굴의 주름도 어제의 그 그 주름과는 다르지 않을까 싶었다. 평범한 일상의 가치란 그 외형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