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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날의마음 Jun 07. 2024

노래는 망했지만 마음은 멀쩡해

요즘 근처 문화센터에서 음악 강의를 듣는다. 오늘의 주제는 예술 가곡. 선생님이 독일 가곡 Lied 를 설명하고 'Ich liebe dich'를 들려주었다. 그리고는 나눠준 독일어 악보에 한글 음도 달아놓았으니 같이 불러보자는데..


노래를 부르자고? 그것도 Lied를?  노래를 불러본 적이 언제였는지 잘 기억도 안 난다. 잔나비, 성시경, 카더가든 이런 노래들은 듣지만 그들은 다 남자가수라 키도 안 맞으니 따라해봤자 후렴 정도이고.  여자노래라면 몇 해 전 한동안 아이유 노래를 불러봤던 게 전부다. 한때는 성악을 배우고 싶었고(여러 사정으로 시도도 못했지만) 하루라도 노래를 안 부른 날이 없었는데 어쩌다...


사실 이 노래는 아주 익숙했다. 지금이야 추억의 올드팝 같은 것이지만 90년대에는 엄청 핫했던 신승훈의 '보이지 않는 사랑'에 삽입되었고, 무엇보다도 고등학교 때 음악시험 곡이었다. 독어 가사도 다 외었음은 물론, 나는 시범조(?)였다. 작곡과 출신의 음악 선생님은 피아노로 몇 소절을 가르쳐주곤 나한테 부르라고 시켰고, 덕분에 나는 음악시험 때면 친구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다. "너 여기 좀 불러봐~~~" 이런 요청을 끊임없이 들었으니까. 유튜브가 없던 시절의 무료재생기였다고나 할까.

       

피아노의 예쁜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과연 높은 소리가 나올까? 노래 가사는 기억이 날까? 좀 반갑고 떨리는 마음으로 큰숨을 들이쉬고 노래를 시작했는데....  


역시 그렇지. 목소리라고 세월이 비껴 갔을까. 몇십 년 만에 불러보는 Ich liebe dich는 엉망진창이었다.  소리는 물에 젖은 솜처럼 푹 가라앉아 올라가지도 않았고 가사도 조각조각 흩어져버렸다. 사람들과 함께 부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내 소리가 새지는 않을지 누가 들을까 민망했다. 나의 목소리와 기억력은 어느 먼 별나라로 이민을 떠나버렸나. ㅠㅠ


배우지 않았어도 잘 할 수 있었던, 누구든 칭찬했었던 그 노랫소리가 내게서 영영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 사실을 오늘에야 깨달은 나는, 조금 섭섭하고 조금 슬프고 조금 아쉽다가 뒷수습에 나서기 시작했다. 노래를 못해도 괜찮지 않아? 나쁠 건 또 뭐냐? 인생을 보다 긍정적으로 보자고 노력하는 현재 시점에서 이런 상황은 적절한 미션일 수도 있었다.

 

남편은 피아노를 잘 친다. 주로 쇼팽인데 가끔씩 바하나 차이콥스키도 친다. 우리 아이는 젊은 나이답게 일렉트릭 기타를 멋지게 친다. 하지만 둘다 노래는 별로다. 남편이야 그러려니 했지만 내속에서 나온 아이는 왜 엄마의 좋은 점은 안 닮았는지 안타까웠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높은 음에서 매끈한 소리를 내기보다 공기 빠지는 소리를 낼 확률이 더 높다.  남편도 아이도 그냥 평범한 거였다.

 

러고 보니 나는 이해력이 부족했던 것 같다. 예전에 아이가 보컬 레슨을 받고 싶다 하길래 "그냥 듣고 따라 하면 되지. 왜 레슨이 필요해?"라고 말했는데 돌이켜보니 미안하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건 몰라서 한 무식한 소리였다. 음정도 가사도 익히기 어려운 것을. 노래는 당연히 그냥 잘 하는 것이 아니라 연습은 물론이고, 종종 레슨도 필요하다. 아이가 다시 레슨 얘기를 꺼내면 꼭 동의해 줘야지. 


그리고 오늘 나의 낯선 경험 덕에 자연스럽게 겸손의 미덕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다. 평소 나는 거짓말도 잘 못하고 무슨무슨 척하는 것도 못하고, 고지식해서 곧이 곧대로 말하곤 한다. 누군가 '노래 잘 해요?'라고 물으면 남들은 '못해요'라고 하는데, 나는 '못하지는 않아요' 라고 답하곤 했다. '잘 해요'라고 한 적도 있었다. 잘 하면서도 못 하는 척 괜히 내숭 떠는 여자애들은 딱 질색이었으니 그런 부류에 합류하기 싫어서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사실을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쑥스럽기도 하고 잘난 척 한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그 시절엔 그래서 욕도 좀 먹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앞으로는 솔직하고 겸손하게 '별로예요'라거나 '못해요'라고  튀지 않고 남들과 비슷하게 묻어갈 수 있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정말로 섭섭했던 마음이 사라져간다. 노래로 먹고사는 것도 아니고 이제와 새삼 높은 음이 안 난다고 아쉬운 일이 뭐 있을까. 목소리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도 아니니 설거지 하면서 흥얼거리는 정도야 뭐. 삑사리를 들으면서 보통 사람은 다 이런 거야, 하고 여유롭게 그 상태를 즐기면 될 일이다. 그리고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연습을 하면 된다. 젊은 시절의 컨디션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오늘보다는 낫겠지.  


노래는 망했지만 마음은 안 망해서, 아니 멀쩡하거나 더 넓어져서 정말 다행이다^^  음, 인생이란  잃기만 하는 것도 얻기만 하는 것도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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