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진 시인의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라도 늦지 않다>를 읽고
11월 느린 오후의 빛을 만났다. 아니, 아직은 차갑지 않은 바람난 늦가을의 ‘바람’을 만난 듯도 하다. 서걱대다가도 은은한 빛으로 감싸 안는다. 여과지로 잘 거른 듯한 식물성의 순순한 투명함이 자꾸 멈춰서게 했다. 중국 땅 고원의 신작로, 먼지를 뒤집어쓰고도 순수로 환했던 그 날이 떠올랐다.
“마음 아픈 시절에 가는 여행은 여행이 아니라 방황이다 - 194쪽”
아슬아슬하게 절벽에 걸린 도교 사원 ‘현공사’ 좁은 법당에 엎드린 채로 얼마나 울었던가? 그런 나그네새를 지켜주던 눈길 하나가 있었다. 속을 게워내었다 싶어 내디딘 계단, 휘청 나락으로 치닫나 싶던 그 순간, 붙들어 부축해준 삶의 이웃이 있었다.
하룻밤 묵은 안나푸르나의 로지 ‘론리 플래닛’에 살던 꼬마소녀와 등굣길을 함께 하기도 하고, 방문객이었던 그를 위해 길안내를 해준 꼬마 소녀와 업고 업히며 세상을 떠돌았다. 시인은.
“말이 통하는 사람, 서로의 깊은 곳을 이해하는 단 한 사람의 벗을 그리워하며 인생은 긴 밤을 보내고 새벽을 맞이한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외로움은 존재의 조건이다. 외로운 행성에서 밤을 새우며 바라보던 설산의 은하수처럼 살아 있는 한 우리는 그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169쪽
시인은 절대적 고독을 끊임없이 얘기하는데 아프거나 슬프지 않다. 에크하르트 톨레의 결을 가진 화법이 겨울 거울 같은 명징함의 투명함을 더해준다. 희노애락의 음계들을 얼마나 오르내렸을까?
“인생은 뭔가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겐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281쪽 ”
란 비기를 그는 어떤 댓가를 치르고 얻을 수 있었을까?
“진심이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주는 징검다리 같은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일은 결국 세상에 진심을 다하는 일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또한 마찬가지이다. -222쪽”
그래서 사랑하는 일이 힘들었구나. 틈새를 비집는 욕심의 그림자가 진심을 덮어버리기도 하니까.
“피아노 앞에서 지휘를 하듯 두 손을 내저었다는 은사는 항거할 수 없는 죽음 앞에 절규와 같은 슬픔을 교향곡 연주하듯 지휘하려 하셨던 것일까? - 268쪽”
한동안 정지한 채로 자기 삶을 통째로 안아 드셨을 그 은사님의 마지막 모습은 극적이라 아름답기까지 하다. 시인의 통렬한 슬픔과는 상관없이. 나의 마지막 모습은 어떨지 더럭 겁이 난다. 내 엄마도 파킨슨을 앓으며 정말 낯선 모습을 보여주고 먼 길 떠나셨다. ‘이별’이라는 것의 정수를 보여주시려는 듯, 엄마는 단칼에 자르고 떠나셨다. 일체의 감정의 소용돌이에, 일체의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깨어있는 삶을 ‘반응하지 않는 삶’이라고 시인은 풀이했다. 내 엄마는 애착과 집착에서 자유로운 상태로 저 세상에선 다른 모습으로 살기로 작정하셨던 걸까?
“그리움에 빠진 사람의 문자는 길고, 아무것도 그리워할 것 없는 사람의 문자는 짧다. 인생이 그러하듯 아쉬움 많은 사람의 이야기는 길고, 담담히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는 겨울날 넘어가는 해의 꼬리만큼이나 짧기만 하다. - 281쪽”
나는 여전히 그리움의 독에 빠져 있다. 아직도 주절주절 늘어놓는 이야기가 많은 걸 보면. “사람은 가도 사랑은 남는다.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라도 늦지 않다”고 했지만, 허공에 부르고 말 이름이 된 그리움들은 아픔으로만 남는다. 나는 끝내 “사랑한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지금 여기에서 나는 그리움의 돌덩이를 굴리며 시지프스의 신화를 다시 써가리라. 시인이 만난 '외로운 코발트 블루'빛의 하늘과 바다를 그리워할 뿐.
- 김재진의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라도 늦지 않다>를 오래도록 품은 날의 일기